이렇게 기도하라 (5)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이어서 등장하는 다섯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절)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전제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후에 다섯 번째 기도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용서라는 실제적인 행동과 연결됩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으로 연결되고 삶이 변화되지 않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뜻 없는 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에 그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를 헬라어 본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해 주시고(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죄를 빚으로 표현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빚을 갚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빚을 모두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천국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1만 달란트(노동자 한 명의 6천만 일치 임금)의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가족들 모두 종이 되고 남은 재산을 팔아서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빚진 자가 모두 갚을 테니 조금만 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백 데나리온(100일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이 있었는데,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오면서 그 사람을 고소해서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원래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노발대발하면서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서 감옥에 가둡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형제가 우리에게 빌려 간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고서 작은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꼭 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河-

 

이렇게 기도하라 (4)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기도로 넘어갑니다. 첫 번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가 관심을 끕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만 각각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 오리겐은 <에피우시오스>가 육신의 양식(떡)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영적인 떡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리겐의 관점을 계승한 견해가 교회에 많이 있었는데,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물론 영어 성경에 보면 “일용할 양식”에 “내일 양식”이라는 주(註)를 달아 놓았습니다. 헬라어 <에피우시오스>에 다음 날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네 번째는 매일 같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길 구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 당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 기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일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과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하루분 양식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가져가면 다음 날 썩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믿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에 대한 내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일용할 양식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먹거리였으니 양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성찬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믿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신앙에 꼭 필요한 영적인 양식, 즉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우리 역시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잠30:8). 거친 세상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河-

이렇게 기도하라 (3)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지난주에는 처음 두 가지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이 되길 기도하고 결심했습니다. 가는 곳에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단순하게 기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을 삶으로 살고 드러내길 원했습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 마지막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목적 또는 하나님의 열망(desire)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 세계의 청지기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거꾸로 갔습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인류를 다시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급기야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딤전2:4).

 

앞에서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지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이뤄진 상태가 곧 하늘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 세상에도 임하길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주기도문 세 번째입니다:“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봅니다. 인간의 욕망이 판을 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열, 목숨을 빼앗아가는 각종 사고와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해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적자생존의 정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철저히 무시되고,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2천 년 전의 팔레스타인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河-

이렇게 기도하라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도가 이어집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간청이 대부분입니다. 조금 더 나가면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것도 이웃을 위한 간청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먼저 하나님을 향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자칫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완성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간섭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3계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삽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2)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첫 번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회개의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니 우리는 “이미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중간기를 살고 있습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7:21). “나라가 임하옵시고”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길 바라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河-

이렇게 기도하라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매년 한 달여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 나눌 주제는 예배 마지막에 함께 부르는 주기도문 송의 가사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합니다. 때로는 중간에 있는 “기도”를 빼고 주문처럼 외웁니다. 본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중언부언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예배나 모임을 끝내는 형식적인 문구로 사용하곤 합니다. 주기도문이 알맹이 없는 형식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번에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맞춰서 우리 기도를 점검하고 바른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에 속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다면,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산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에게 팔복(the beatitude)과 산상수훈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은 새로운 율법입니다. 주기도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로 시작하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마침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기도와 우리에 관한 세 가지 기도로 균형을 이루면서 차례로 진행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에 주기도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을 때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의 시작입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늘 위를 가본 사람이 없으니 우주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하나님은 낮의 구름과 해, 밤의 달과 별 너머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구별되시는 초월적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내려다보실 것이니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자가 되십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능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연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시작 기도에 우리의 진실함, 간절함, 감격과 소망, 하나 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