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데가 어디냐

올해 마지막 주일이자 로마서 3장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로마서에서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돕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롬3:27-31)은 크게 세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째는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27절)입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심지어 신앙적으로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갖고 있던 율법이나, 헬라인 또는 세상 스승들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으로 의롭게 될 수 없기에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자랑할 뿐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29절)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독점했습니다.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별칭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질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31절)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율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계속해서 죄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우리를 회개로 이끌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율법의 본뜻을 이룰 수 있으니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河-

2018년 12월 4주 성탄주일

성탄 주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 9장 6절

성탄예배: 기쁘다 구주오셨네/누가 2:1-20

 

찬양:

거룩한 주 예수

사랑이 예 오셨네

 

봉헌송 연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어김없이 올해도 성탄절을 맞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네 번의 대강절 후에 맞는 성탄절입니다. 그동안 한주 한주 보내면서 마음에 촛불을 밝히며 성탄절을 기다렸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배웠듯이 우리는 물론 세상에 예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을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니 하루빨리 누군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를 가장 잘 아는 분이어야 가능합니다. 인간은 물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죄가 없는 몸을 입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우리가 매주 함께하는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와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기름부음 받은 자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셨는데, 천여 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자신을 비워서 종의 형체 즉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을 겪으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대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 칭의,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속량, 우리가 져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속죄소에 오르신 속죄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9장 6절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한 아기가 낳을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온 세상을 통치할 왕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것도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부서지고 어그러진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도 예수님의 평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마음속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평화의 왕 우리 예수님께서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화를 주시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행여나 부서진 이웃과의 관계가 있다면 평화의 예수님을 맞음으로 화해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河-

화목제물

로마서 3장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깜깜한 세상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니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 이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서 생긴 결과입니다. 결국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롬3:9).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선, 죄인이라고 판정받은 인간을 구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속량(redemption)”이라고 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속량은 시장에서 값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종이나 포로로 잡힌 사람을 대신해서 벌을 받거나,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업적없이 예수님의 속량으로 우리를 구해 주셨으니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은혜에 참여하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면서 은혜로 구원에 이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구원 사역을 이루신 예수님의 신실함에 참여함으로 속량의 은혜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인이라는 판정이 번복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속량이 상업용어라면 칭의는 법정 용어입니다. 더이상 죄인이 아님을 법적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심은 구약시대 피의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법궤의 뚜껑을 가리킵니다. 또한 제물을 올려놓던 제단(mercy seat)을 가리킵니다.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므로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속죄소에 올려졌고 하나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우리는 단지 감사할 뿐입니다.-河-

값없이 은혜로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많은 일을 할 줄 알았지만 지내고 나면 하나님께서 하셨고, 가족과 이웃들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감사가 저절로 나오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연말입니다. 남은 한 달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근사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속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기 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당회(교인 총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연말을 맞아서 출타하시는 성도님들이 많은 관계로 예년보다 조금 일찍 당회를 갖습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도 안팎의 돕는 손길을 통해서 감사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조국의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2년 연속 작은 사랑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앞으로도 기도와 말씀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참빛 식구들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로마서 3장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세상은 어둠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게 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요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없이 의로운 한 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죄의 값을 치르시면서 우리를 죄로부터 풀어 주셨습니다.

 

“속량(redemption)”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누군가 대신 값을 치르고 노예 상태나 감옥 등에서 풀어주는 것을 뜻하는 상업 용어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하는 속량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었고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다시금 되새기기 원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河-

하나님의 한 의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한 의”는 죄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 절인 1장 16-17절입니다.

 

로마서 2장부터 복음이 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는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로마서 2-3장에서 복음의 핵심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버렸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고,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며 섬겼습니다. 세상의 추한 일들이 모두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가 될 때까지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율법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도 그릇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이 최고라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고 했을까요(롬2:24). 헬라인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나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결코 나을 수 없습니다(롬3:9). 이처럼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을 믿거나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의인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술의 말로 저주하고, 발은 피 흘리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전혀 필요가 없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로 충분하니 구약성경은 용도폐기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요 말씀이니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죄가 무엇인지 판명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되는 21절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일찍이 예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은 물론 양심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성품과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와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