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없나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로마서 3장 10-18절에는 열네 개의 구약 말씀이 절묘하게 인용되고 결합되어 있습니다. 원래 랍비 교육을 받았던 바울이기에 구약 성경에 정통했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구약을 마스터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과시라도 하듯이 구약 말씀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본문의 기초가 되는 말씀은 시편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를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리석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행실도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모실 곳에 세상이 자리잡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굽어살피시니 모두 한가지로 치우쳤고 악한 길로 갈 뿐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자기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혼란스럽습니다. 금세 사라지고 결국은 썩어질 것을 애지중지 여기며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추구하니 하나님 눈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을 묘사했던 말씀도 인용합니다(시편 5:9).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로는 아첨을 떨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상 풍조에 맞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모함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3천 년 전 다윗 시대에도 있었다니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악인을 고발하는 시편 140편 3절의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약이 되는 말이 아니라 독을 묻힌 말로 서로 저주합니다. 악한 마음이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잠언 1:16과 이사야 59:7-8절의 인용을 통해서 악한 사람들의 행동, 발걸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음을 넘어서 악한 마음을 품고 실제로 악한 행동을 하는 세상입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들이 세상을 주관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과 그것에 조종받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을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의인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니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그 아들을 보내주셨을까요! 세상의 어그러진 모습을 돌아보니 주의 은혜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할렐루야! -河-

2018년 11월 3주 말씀과 찬양 (추수감사주일)

로마서 3장 강해 (2):  우리는 나으냐/ 로마서 3:9

찬양: 하늘을 바라보라

 

찬양: 저 천국 음악소리

봉헌송: 참 아름다워라 (바이올린; 이지수)

2018 감사절에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추수”라는 말은 예전 우리나라가 농경 문화일 때 붙여진 명칭입니다. 미국은 물론 영어의 표현은 “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12월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계획과 달리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했는데 동부의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듬해 가을 추수를 끝내고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가졌고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성경에서 찾으면 가을 수확을 마치고 지키는 수장절(또는 초막절)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는 봄, 여름, 가을에 걸쳐서 수확했던 이스라엘의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지킨 절기들이고, 추수감사절이 단순히 미국의 명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예전 우리나라도 농사가 주업일 때는 가을에 수확을 끝내고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기에 추수 감사라는 용어가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사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모든 일이 우리가 뜻한 대로 펼쳐진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아쉽고 부족한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가정과 생업을 지켜주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크고 작은 일들 속에 임한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감사하기 원합니다.

 

400여 년 전 청교도들이 처음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들을 도와준 인디언 추장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들이 농사와 사냥은 물론 집을 짓는 생존방법을 알려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생명의 은인들이었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일 년 동안 함께 한 이웃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도 놓칠 수 없습니다. 자칫,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대한 감사를 소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웃의 손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올 한해도 잘 견뎌준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홀로 설 수 없지만, 때때로 외롭고 험한 길을 스스로 잘도 걸어왔습니다. 때때로 혼자라서 외로웠지만 대견하게 견뎠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향한 감사도 빼놓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기 원합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복되고 풍성한 감사절 맞으시길 바랍니다.-河-

로마서 3장 (1):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10월 한 달 동안 살펴보았던 교회사 속의 세 인물은 모두 로마서를 통해서 인생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쾌락을 버리고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로마서 13장 13절 말씀을 들고 읽으면서, 젊음의 쾌락과 성공을 향한 욕망을 벗어나서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회의 교리를 굳게 믿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탑의 경험”이라고 불리는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 1:17절 말씀을 통해서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찾은 부흥 집회에서 사회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에 뜨거움을 경험했습니다. 웨슬리는 그 이후로 자신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고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세 명의 인물 외에도 신약성경의 로마서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전에 로마서의 보석이라 불리는 로마서 8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 5장을 주일 설교에서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로마서의 시작이며, 복음의 시작인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살펴보면서, 자기 성찰과 우리 안에 임하는 은혜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성공을 위한 경쟁과 암투, 다양한 종교들의 전파, 쾌락은 물론 도덕의 무너짐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모습이 2천 년 전 로마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세워졌고,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세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 진단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고 거꾸로 이용하고,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만 실제 행함은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제시합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로마서 3장 말씀을 통해서 교회사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말씀의 은혜에 깊이 빠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河-

터닝 포인트 (4): 마틴 루터

지난 번에 살펴보았던 어거스틴은 “지향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젊음의 쾌락, 세상의 야욕, 심지어 자기를 매료시킨 학문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의 회심을 위해서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건만, 하나님께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들은 신앙이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신앙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한참을 돌아서 하나님께 왔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서른두 살이 되도록 헛된 것을 바라보고 산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웨슬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성 클럽을 만들어서 성경과 고전을 읽고, 엄격한 규칙을 지키고,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는 등 신앙적으로 탁월한 엘리트의 길을 걸어갔지만, 대서양의 폭풍우 앞에서 그의 신앙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바라보며 추구한 신앙이 소용없을 만큼 웨슬리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올더스게이트 집회에서 마음의 뜨거움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몸소 체험하니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돌아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도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생각이 판치는 당시의 교회에서 성직자가 되었고 로마 교황청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갈 정도로 의로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바라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신앙의 업적을 쌓으려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노력하면 할 수록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만 눈에 들어와서 괴로웠습니다.

 

어거스틴이나 웨슬리가 그랬듯이 마틴 루터 역시 로마서 말씀을 읽는 중에 자기 안에서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낯선 의”가 들어와서 자신을 변화시킬 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깨달았기에 “오직 말씀으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능함을 알았기에 “오직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임을 알았기에 “오직 은혜로”라는 종교 개혁의 표어를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터닝 포인트라는 제목의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를 깊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

종교 개혁 주일에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재직하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앞에 교황과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했습니다. 루터는 잘못된 길로 가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관심있는 사람들과 학문적인 토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루터가 반박문을 게시하기 2년 전부터 독일 교회가 베드로 성당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면죄부 통에 동전을 넣는 순간 연옥에 있던 조상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백성들을 오도했습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면죄부 판매에 반대했고, 루터는 면죄부 판매는 물론 당시 교황과 교회의 그릇된 모습을 고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루터가 95개조에 이르는 반박문을 게시할 때만 해도 루터의 행동이 기독교는 물론 세계 역사를 바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될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자신의 작은 행동이 교회를 변화시키는 터닝 포인트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화약고처럼 가득 차 있던 세상에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에 불을 붙이는 첫 번째 시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개혁의 물결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마틴 루터에게는 개혁을 주도할 정도의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협심증에 시달릴 정도로 소심한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논쟁에 휘말렸습니다. 종교 재판에서 가톨릭 사제의 신분도 박탈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주어진 길을 담대하고 꿋꿋하게 걸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종교 개혁자 루터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도화선이 되어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열매가 현재 개신 교회입니다. 그러니 개신교회는 교회나 사회의 그릇된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개혁을 주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개신교회의 모습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첫 번째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의 참회로 시작됩니다.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과 인간적인 계획을 하나님의 일로 착각하거나 둔갑시키는 것이 타락과 죄의 길임을 종교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개인의 신앙과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종교 개혁 정신을 기억하며 날마다 새롭게 되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