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4주 성탄주일

성탄 주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 9장 6절

성탄예배: 기쁘다 구주오셨네/누가 2:1-20

 

찬양:

거룩한 주 예수

사랑이 예 오셨네

 

봉헌송 연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어김없이 올해도 성탄절을 맞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네 번의 대강절 후에 맞는 성탄절입니다. 그동안 한주 한주 보내면서 마음에 촛불을 밝히며 성탄절을 기다렸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배웠듯이 우리는 물론 세상에 예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을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니 하루빨리 누군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를 가장 잘 아는 분이어야 가능합니다. 인간은 물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죄가 없는 몸을 입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우리가 매주 함께하는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와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기름부음 받은 자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셨는데, 천여 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자신을 비워서 종의 형체 즉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을 겪으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대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 칭의,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속량, 우리가 져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속죄소에 오르신 속죄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9장 6절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한 아기가 낳을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온 세상을 통치할 왕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것도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부서지고 어그러진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도 예수님의 평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마음속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평화의 왕 우리 예수님께서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화를 주시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행여나 부서진 이웃과의 관계가 있다면 평화의 예수님을 맞음으로 화해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河-

화목제물

로마서 3장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깜깜한 세상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니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 이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서 생긴 결과입니다. 결국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롬3:9).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선, 죄인이라고 판정받은 인간을 구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속량(redemption)”이라고 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속량은 시장에서 값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종이나 포로로 잡힌 사람을 대신해서 벌을 받거나,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업적없이 예수님의 속량으로 우리를 구해 주셨으니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은혜에 참여하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면서 은혜로 구원에 이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구원 사역을 이루신 예수님의 신실함에 참여함으로 속량의 은혜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인이라는 판정이 번복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속량이 상업용어라면 칭의는 법정 용어입니다. 더이상 죄인이 아님을 법적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심은 구약시대 피의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법궤의 뚜껑을 가리킵니다. 또한 제물을 올려놓던 제단(mercy seat)을 가리킵니다.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므로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속죄소에 올려졌고 하나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우리는 단지 감사할 뿐입니다.-河-

값없이 은혜로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많은 일을 할 줄 알았지만 지내고 나면 하나님께서 하셨고, 가족과 이웃들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감사가 저절로 나오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연말입니다. 남은 한 달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근사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속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기 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당회(교인 총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연말을 맞아서 출타하시는 성도님들이 많은 관계로 예년보다 조금 일찍 당회를 갖습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도 안팎의 돕는 손길을 통해서 감사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조국의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2년 연속 작은 사랑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앞으로도 기도와 말씀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참빛 식구들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로마서 3장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세상은 어둠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게 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요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없이 의로운 한 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죄의 값을 치르시면서 우리를 죄로부터 풀어 주셨습니다.

 

“속량(redemption)”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누군가 대신 값을 치르고 노예 상태나 감옥 등에서 풀어주는 것을 뜻하는 상업 용어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하는 속량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었고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다시금 되새기기 원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河-

하나님의 한 의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한 의”는 죄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 절인 1장 16-17절입니다.

 

로마서 2장부터 복음이 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는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로마서 2-3장에서 복음의 핵심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버렸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고,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며 섬겼습니다. 세상의 추한 일들이 모두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가 될 때까지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율법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도 그릇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이 최고라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고 했을까요(롬2:24). 헬라인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나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결코 나을 수 없습니다(롬3:9). 이처럼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을 믿거나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의인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술의 말로 저주하고, 발은 피 흘리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전혀 필요가 없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로 충분하니 구약성경은 용도폐기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요 말씀이니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죄가 무엇인지 판명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되는 21절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일찍이 예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은 물론 양심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성품과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와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河-

의인은 없나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로마서 3장 10-18절에는 열네 개의 구약 말씀이 절묘하게 인용되고 결합되어 있습니다. 원래 랍비 교육을 받았던 바울이기에 구약 성경에 정통했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구약을 마스터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과시라도 하듯이 구약 말씀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본문의 기초가 되는 말씀은 시편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를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리석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행실도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모실 곳에 세상이 자리잡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굽어살피시니 모두 한가지로 치우쳤고 악한 길로 갈 뿐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자기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혼란스럽습니다. 금세 사라지고 결국은 썩어질 것을 애지중지 여기며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추구하니 하나님 눈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을 묘사했던 말씀도 인용합니다(시편 5:9).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로는 아첨을 떨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상 풍조에 맞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모함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3천 년 전 다윗 시대에도 있었다니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악인을 고발하는 시편 140편 3절의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약이 되는 말이 아니라 독을 묻힌 말로 서로 저주합니다. 악한 마음이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잠언 1:16과 이사야 59:7-8절의 인용을 통해서 악한 사람들의 행동, 발걸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음을 넘어서 악한 마음을 품고 실제로 악한 행동을 하는 세상입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들이 세상을 주관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과 그것에 조종받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을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의인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니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그 아들을 보내주셨을까요! 세상의 어그러진 모습을 돌아보니 주의 은혜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