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포의 왕관

“저는 지금 집이 없어요. 부상은 크지 않지만 어제부터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요. 살고 싶습니다. 죽고 싶지 않아요.” 5년째 내전이 계속되면서 폐허가 된 시리아 알레포에 사는 한 소녀가 지난달 말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서 세상에 전한 애절한 메시지입니다.

 

2011년에 시작된 “아랍의 봄” 물결은 50년 이상 지속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리아 국민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적 저항이 내전으로 발전하고, 러시아와 아이시스(ISIS)까지 개입하면서 시리아는 완전히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수백만 명의 국민이 고향을 떠나서 피난민으로 전락했고 그 중에 2천 명 이상은 국경을 넘고 지중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8월에는 다섯 살 소년이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 폭격을 맞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표정으로 앰브란스에 앉아 있는 사진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뒤집혀서 터키 해안가에서 발견된 빨강 셔츠를 입은 세 살배기 아기의 시신을 보고 온 세상이 함께 울었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참상이 시리아에서 일어났고, 반군이 주둔하고 있던 알레포라는 도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알레포의 시민 운동가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나 옷 심지어 기도도 아니고, 국제 사회가 공조해서 러시아와 정부군의 폭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폭격에 대한 상처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라니 전쟁의 참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레포라는 도시는 우리가 현재 갖고있는 구약성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원본은 없고 현재 가장 오래된 사본은 맛소라로 지칭되는 학자들이 필사한 것입니다. 900년경 유대인 랍비들이 양피지 위에 쓸개로 만든 잉크를 갖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필사했습니다. 그때까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문맥에 따라서 성경을 읽었는데, 맛소라 학자들이 정확한 발음을 위해서 모음을 첨가했고 액센트는 물론 노래로 말씀을 음미할 수 있도록 악상 표시까지 기입했습니다. 여백에는 주석도 기록했습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구약성경 히브리어를 바르게 읽을 수 있고 원본에 가깝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본이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되었지만, 그 가운데 한 권의 필사본이 이집트를 거쳐서 600년 가까이 시리아 알레포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서 보존되었습니다. “알레포 코덱스”라 불리는 히브리어 필사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입니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알레포가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1947년 이스라엘의 건국이 발표되면서 알레포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알레포 코덱스는 우여곡절 끝에 모세 오경을 비롯한 많은 분량이 소실 된 채 현재는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구약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우리는 600년 동안 필사본을 보관해준 알레포라는 도시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알레포가 하나님 말씀인 구약성경을 600년 동안 품고 있었듯이, 이제 하나님께서 알레포를 품어 주시고 그곳에 평화가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알레포 왕관으로 불리는 알레포 코덱스처럼 전쟁으로 찌들고 절망 속에 살고 있는 알레포 아이들 머리 위에 왕관이 씌어 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왕관까지는 아니어도 밖에서 마음껏 뛰놀고, 학교에서 배우고, 오손도손 가족과 함께 지내고, 폭격의 공포 없이 해맑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을 바라만 볼 수 있어도 그들에게는 최고의 축복일 것입니다.

 

칼럼을 준비하면서 시리아 어린이들을 도울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그들을 후원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연말이 가기 전에 조그만 정성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새해 정유년(丁酉年)에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알레포를 비롯한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로 울려 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6년 12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유토피아

영국의 저술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유토피아는 유토푸스라는 사람이 만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섬입니다.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 주민들은 한 군데 오래 머물면 타성에 젖고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10년마다 이사해야 합니다.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게으름 피우는 사람없이 모든 주민이 똑같이 일하니 노동생산성이 매우 높습니다. 화폐가 없어서 재산 축적이 불가능합니다. 주민들은 시장에 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큼 갖다가 먹고 쓰면 됩니다.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은 노예들을 결박하는 쇠사슬로 사용됩니다. 주민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가 독재를 일삼거나 부패하면 곧바로 퇴각시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없다”라는 헬라어 <우>에 장소를 가리키는 <토포스>가 결합한 말로서 “지상에 없는 장소(no-place)”를 가리킵니다.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탐욕과 교만, 권력에 취한 세상이 유토피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을()로 사는 우리네 범인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재물과 권력을 손에 쥐고 수퍼 갑(甲)으로 사는 이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사는 유토피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입니다.

 

토머스 모어의 친구였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풍자소설을 썼습니다. “모리아”라는 여신을 통해서 당시에 부패했던 종교계와 가진 자들의 위세를 비판합니다. 두 눈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동네를 방문하면 바보 취급받는 것이 우리네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보고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동굴 밖의 세상을 알려주면 도리어 그를 어리석다고 놀립니다. 우신예찬의 주인공 모리아가 세상을 올바로 보고 있지만 바보 취급받듯이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96년 전, 유토피아를 꿈꾸며 유럽을 떠나서 신대륙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저항하며 바보처럼 살았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66일 동안 메이플라워를 타고 우여곡절끝에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유토피아를 꿈꾸며 목숨 걸고 대서양을 건넜지만, 신대륙의 혹독한 추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절반이 죽고 50여 명만 살아남습니다.

 

이들이 찾은 신대륙도 유토피아는 아니었습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들이 씨를 뿌리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가축을 키우는 법 등을 가르쳐줍니다. 어리석고 야만인처럼 여겼던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그해 가을,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벌였는데 그 순간은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의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입니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을 것 같습니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 역시 완벽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디스토피아(나쁜 곳)”로 불릴 정도로 추하고 슬픈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편견도 심해서, 두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진실을 왜곡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선거 때마다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만, 권력을 손에 쥐면 자기 배를 채우고 갑질하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서 유토피아를 향해서 나갑니다.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서로 격려합니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당해도 진실되고 바른길을 걸어갑니다.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깜깜한 세상에 빛을 밝힙니다. 정의가 물같이, 하나님의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도 기억합니다. 세상 속에 개입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유토피아를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둔 채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가까이는 추수감사절에 함께 모이는 가족, 교회 식구들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 유토피아를 경험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2016년 11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살아남기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001년 <타임>지가 선정했던 미국 최고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1940년 텍사스의 시골 마을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벽돌 쌓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런 일은 백인보다 흑인들이 주로 하던 작업이었는데 스탠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밑바닥부터 건축 일을 익히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신학과 삶을 벽돌 쌓기에 비유해서 이야기체로 풀어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목회자가 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부모님과 주변의 권유로 텍사스에 있는 조그만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던 학문의 세계를 경험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납니다. 4학년 때는 사교모임에 갔다가 “앤”이라는 여학생을 만나서 일 년 만에 결혼에 이릅니다. 그러나 앤과의 결혼이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짐이 될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스탠리의 아내 앤은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었습니다. 연애 시절부터 은근한 남성 편력이 있었고 때때로 자기 통제가 되지 않아서 화를 내곤 했지만, 스탠리는 아내의 성격과 행동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담”이라는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내 앤의 성격이 포학해집니다. 조울증이 심해져서 감정 조절이 되지 않고, 때때로 발작까지 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스탠리 가정 안에서는 전쟁입니다.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아내 앤은 그 책임을 남편인 스탠리에게 돌리면서 남편을 집중적으로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하루도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지만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4년 동안 아내와 아들을 돌봤습니다. 대단한 내공이요 신앙입니다. 결국 아내 앤은 새로운 남자를 찾아서 집을 떠나고, 얼마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서전 <한나의 아이>에서 자신의 신학 여정과 가정사를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니가 구약 성경의 한나처럼 기도해서 스탠리를 얻었기에 자신을 “한나의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자서전 <한나의 아이>의 부제는 “어떤 신학자의 회고록”입니다. 텍사스 시골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예일대학에서 기독교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듀크 대학에서 가르치게 된 학문의 여정을 벽돌 쌓기 하듯이 꼼꼼하고 정확하게 짚어갑니다. 그런데 그가 겹겹이 쌓아가는 인생의 벽돌마다 조울증을 앓았던 아내와 지낸 질곡의 삶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놓고 답을 찾지 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합니다. 아니 찾을 수 없었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스스로 선택할 겨를도 없이 닥쳐온 우발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종류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어려움이기에 답을 제시하거나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대신에 그는 인생의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았습니다. 견디기 힘들었던 개인적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신학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 비결이었습니다.

 

“살아남기(survival)”는 그의 자서전에 있는 소제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고통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희망의 끈을 붙들고 있게 된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도 인생길 여기저기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갑자기 닥쳐오기도 하고, 서서히 찾아오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왜 그런 어려움이 닥치는지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답지 없이 주어진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답이 없다고 체념하거나 질문만 쏟아내지 말고, 끝까지 견디고 결국 살아남는 것이 신앙의 힘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누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응원하고 있음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2016년 10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구약성경 룻기

올가을에는 청년들과 구약성경 룻기를 읽기로 했습니다. 룻기는 네 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책의 제목이 룻기라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룻은 이스라엘과 껄끄러운 관계였던 이방 민족 모압 출신입니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온 외국인 여성입니다. 룻의 출신과 신분을 고려하면 39권 구약성경의 제목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룻은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올렸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도 룻이 등장합니다.

 

룻기의 배경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한 사사 시대입니다.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왔건만, 이스라엘은 광야 시절보다 더 심하게 타락합니다. 룻기 바로 앞에 위치한 구약 성경 사사기의 마지막 다섯 장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펼치는 막장 드라마입니다. 오늘날 성직자에 해당하는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타락에 관여했다는 것 자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전이 일어나서 한 지파의 남자가 모두 살해되는 비극까지 초래합니다. 우상숭배와 타락, 폭력과 살인, 거기에 극도의 개인주의가 판을 치던 사사 시대가 요즘 세대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처럼 룻기는 악하고 험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룻기는 가뭄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이주한 베들레헴 출신의 한 가족에게 밀어닥친 비극으로 시작합니다. 병약한 두 아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서 피난을 갔는데 가장이 죽습니다. 홀로 남은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켜서 10년을 잘 지냈는데 그만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 출신 두 며느리, 즉 남편을 잃은 세 여인만 남았습니다.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두 며느리 가운데 룻만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금의환향은 커녕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며느리 룻과 단둘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인생무상입니다. 이름 뜻 그대로 쾌활한 여인이었을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 즉 쓰디쓴 인생의 여인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룻기의 1막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생활 전선에 뛰어듭니다. 보리를 수확하던 때였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놓은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나간 것입니다. 그때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의 밭입니다. 보아스는 매우 선한 인물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모압 여인 룻이 보리 이삭을 마음껏 줍도록 배려합니다.

 

양식을 충분히 마련해서 돌아온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모압 며느리 룻을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에게 시집 보낼 생각을 합니다. 보아스가 추수를 끝내고 타작 마당에서 자고 있을 때, 그에게 슬쩍 들어가서 프러포즈를 하라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룻기의 여인들이 꽤 적극적입니다. 보아스 역시 룻을 흔쾌히 받아줍니다. 보아스보다 룻을 책임질 가까운 친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의견을 먼저 묻고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오벳, 즉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처럼 룻기의 후반부는 타작 마당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룻기 속에는 주인공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길로 뒷전에서 일하십니다. 모든 이들이 제 뜻대로 행하는 악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룻기의 주인공들은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뿐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이방 여인 룻을 책임지고 구해주는 보아스를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고 책임져 주신 예수님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그런 점에서 룻기의 신앙은 철저히 “생활 영성”입니다. 신앙이 삶 속에 녹아있고, 삶이 곧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모습을 룻기를 통해서 배웁니다. (2016년 9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올림픽 미담 (美談)

브라질에서 열린 2016년 하계 올림픽이 16일간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지난 주일 막을 내렸습니다. 시작하기 전부터 브라질의 불안한 치안과 공중위생,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올랐던 올림픽이었는데 큰 사고 없이 막을 내려서 다행입니다.

 

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지구촌의 축제입니다. 각 국가와 언론들이 금,은,동 메달을 집계하고 순위를 발표하지만, 실제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순위를 매기지 않습니다. 지구촌의 평화와 우정을 도모하는 친선 대회인 셈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올림픽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상업화된 것도 사실입니다.

 

여느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도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 미담(美談)이 쏟아졌습니다. 120년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을 피해서 조국을 떠난 열 명의 선수가 난민팀을 구성해서 참가했습니다.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기를 가슴에 달고 입장하는 난민팀 선수들에게 전 세계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20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지만, 자신들에게 찾아온 역경을 이기고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할 경비가 없어서 노상에서 모금하며 간신히 참가했는데 동메달을 목에 거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선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SNS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펜싱 선수는 결승전에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다 진 경기를 뒤집고 국민들에게 금메달을 선사했습니다. 100여 년 만에 올림픽 종목이 된 골프의 금메달 역시 대한민국이 가져왔습니다. 지난 보름 동안 브라질 리우에서는 이처럼 각본 없는 드라마가 매일같이 펼쳐지면서 전 세계를 올림픽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선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여자 마라톤에 참가한 캄보디아 선수입니다. 올해 마흔네 살의 리 나리 선수는 우승을 차지한 케냐 선수보다 1시간 이상 늦은 3시간 20분을 달려서 맨 마지막에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마흔네 살의 나이로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다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 선수의 인생 여정은 더욱 특별했습니다.

 

나리 선수는 어릴 적 크메르루즈 군에 의해서 수백만이 학살당한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고아가 된 어린 소녀는 아홉 살에 국제 적십자사에 의해서 프랑스로 입양되었습니다. 스물여섯에 조국 캄보디아로 돌아온 나리 선수는 에이즈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생물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서른네 살의 나이로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자선 마라톤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불혹도 훨씬 넘은 나이에 국가 대표가 되었고 이번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나리 선수는 157명이 참가한 이번 마라톤에서133등을 했습니다. 중간에 포기한 선수들을 제외하면 맨 마지막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경찰들과 경기 진행 요원들이 나리 선수를 쫓아가면서 도로에 설치해 놓은 보호벽을 철거하고 교통통제를 해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 캄보디아 국기를 들고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관중들은 나리 선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왠지 우리 식 이름과 비슷해서 더욱 친근해 보이는 마흔네 살의 마라토너 “나리” 선수를 보면서 부모를 잃고 낯선 나라에 입양되어서 성인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외로움과 살아남은 끈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리 선수는 3시간 이상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새기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을 것입니다. 기록이나 입상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올림픽에서 조국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뛰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나리 선수를 통해서 우리가 걷는 인생길도 생각해 봅니다. 나리 선수에게 독특한 과거와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도 자신만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주어진 인생길을 걷고 때로는 뜁니다.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되뇌면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올림픽 경주가 아니니 우리가 뛰는 모습을 구경하는 관중도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록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더욱 자유롭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인생길을 끝까지 달려가면 됩니다. 마지막 결승점에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6년 8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걸어가는 신앙

 90년대 후반, 우리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아이들 사이에서 “포켓몬”이라는 게임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학교에서 오면 포켓몬 카드를 갖고 놀았습니다. 게임 뿐만 아니라 만화영화는 물론 아이들 옷이나 문방구에 온통 포켓몬 캐릭터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포켓몬은 닌텐도라는 게임회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다양한 상품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포켓 몬스터”의 약자로 “주머니 속의 괴물”이란 뜻입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괴물들을 훈련시키는 트레이너가 되어서 몬스터 볼로 불리는 가상의 상자에 괴물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고 키울 수도 있습니다. 피카츄라는 십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쥐 형상의 캐릭터가 가장 유명합니다. 캐릭터들이 자라고 진화하면서 아이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게임입니다.

최근에 포켓몬 열풍이 우리가 사는 샌프란시스코를 필두로 다시 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게임과 현실을 혼합시킨 증강현실(AR)에 “포켓몬 고(go)”라는 신종 게임을 장착시켰습니다. 미국에서만 하루 사용자가 3천만 명에 육박하고, 전 세계에 포켓몬고 돌풍이 불고 있습니다. 거리에서도 휴대폰을 보면서 걷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가로수에 부딪히거나 도로로 뛰어들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범죄에 사용된다는 끔찍한 소식도 있습니다.

 

요즘 세대를 따라잡고 싶어서 저도 휴대폰에 포켓몬고 게임을 설치해보았습니다. 설치를 끝내자마자 우리 집 거실 텔레비전 앞에 포켓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괴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매우 귀여운 모습입니다. 우리 집에 포켓몬이 사는 것 같아서 놀랍고 또 신기했습니다. 포켓몬 볼을 던져서 잡으니 또 한 마리가 책꽂이에 나타납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두 마리 모두 잡았더니 2단계로 진입했다는 메시지가 뜹니다. 이번에는 집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웬걸 남의 집 안에 포켓몬이 있습니다. 도서관에도 나타나고 이러 저리 동네를 헤매고 다니게 생겼습니다. 저의 포켓몬고 체험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자칫 목사가 게임에 빠져서 예배시간에도 포켓몬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한다면 큰일 날 일입니다. 얼른 게임을 지웠습니다.

 

포켓몬고 게임 뒤에 붙은 “고(go)”를 보면서 “걷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할락크>가 생각났습니다. 히브리어 할락크에는 어디론가 길을 떠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멈춰 있지 않고 발을 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리아 땅으로 길을 떠날 때도 할락크라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길을 떠난 것입니다.

 

히브리어 할락크에는 길 위를 걷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길 위를 걷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여정, 즉 여행길입니다. 인생길을 걷는 것도 할락크입니다. 우리 모두 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것도 할랄크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길을 걷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도 할락크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그들이 지켜야할 율법을 할락크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을 써서 <할락카>라고 부릅니다. 율법은 발로 걸어가면서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말씀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할락크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멈춰있는 명사나, 화려한 형용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들고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그리고 거리로 흩어지는 것이 할락크 즉 걸어가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날을 <할락크> 걸어갑니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포켓몬 (주머니 속의 괴물)을 찾아서 걷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진리를 향해서 걷습니다. 생명 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인생길 고비고비에서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도 만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걷고 또 걷기 원합니다. (2016년 7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사랑의 하나님

 청년들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심판)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 사랑으로 포용해주고, 어떤 지점에서는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배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사랑과 공의라는 속성이 함께 있지만, 하나님의 속마음은 사랑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십니다. 증오와 죽음이 판치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을 빛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온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고 과정입니다.

 

한 청년은 요즘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과연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회의가 든다고 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받고, 아무 연고 없이 목숨을 잃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살면서 자연스레 생긴 신학적 질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의로우면서도 고난받은 욥이 있지만, 욥기를 수없이 읽어도 뒤죽박죽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흡족한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연대하면서 함께 울 뿐입니다. “언제까지이니까?”라고 그들과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청년들에게는 세상의 그릇된 모습을 바로잡고, 의와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데 참여하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로 많은 희생자를 낸 총기 참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슬람과 관련된 테러인 줄 알았는데, 동성애까지 관련된 증오범죄라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동성애자들이 가는 클럽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수사당국에서는 사건의 원인과 경위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원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끝에 총기규제에 대한 법안을 만든다니 이번에는 꼭 통과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50명의 희생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종교나 인종, 성적 지향을 떠나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미워해서 테러를 저지르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동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이 누구이든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화들짝 놀랄 소식이 새크라멘토에 있는 한 미국교회에서 들려왔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는 젊은 목사가 올랜도 참사를 놓고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설교한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희생당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고, 총기를 휘두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것이며,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읽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목사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막말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1년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총기 참사가 생각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흑인 교회에 백인 청년이 들어와서 한 시간 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말미 기도시간에 이 청년은 흑인들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으니 돌아가라고 외치면서 총격을 가해서 아홉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희생자 가족들은 총격을 가한 청년을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증오와 그에 따른 범죄를 막는 방법이 사랑과 용서 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은 희생자 가족들이 표한 사랑에 감동받고 그들의 신앙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청년의 질문,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생기는 신앙의 회의,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안타까운 총기 참사를 보면서 이 모든 것을 푸는 열쇠는 찰스턴 교회의 성도들이 몸소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녹입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답입니다.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6년 6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언제나 청춘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의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두 아이가 결혼하기 전에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이 너무 야무지고 이상적이어서 얼마 전부터 하와이로 바꿨지만,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미시간의 큰 아이가 방학을 맞아서 집에 오고 회갑을 맞으신 한국의 누님께서 방문하셨던 지난달에 그랜드 캐년을 다녀오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10년 전 인디애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할 때 그랜드 캐년을 처음 보았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기대하면서 이틀에 걸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웅장한 그랜드 캐년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서 명암이 생기고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는 깎아내린 듯한 협곡과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콜로라도 강, 심지어 10년 전 가족사진을 찍었던 바위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 인터넷에 저장해 놓은 10년 전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랜드 캐년은 변한 것이 없는데 사진 속의 우리 가족은 많이 변했습니다. 청소년이던 두 아들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0년 전 우리 부부는 조금 과장해서 신혼부부처럼 젊었습니다. 그랜드 캐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건만 사진 속에는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만약10년 후에 다시 그랜드 캐년을 찾는다면 어떻게 변해있을까 생각하니 슬며시 우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할아버지가 사진 속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전도서 읽기를 마쳤습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서는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이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말씀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이 전도서를 대표합니다. 물론 여기서 헛되다는 것은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인생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생 중에도 지금 이곳의 현재를 즐기며,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서는 청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전도서 말씀을 청년들에게 제한할 수 없습니다. 청년의 때는 누구에게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울만이 청춘이라는 시에서 말했듯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개인적으로 날마다 청년의 때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갈렙은 85세가 되었어도 자신을 청춘이라고 밝히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신 험한 산지를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합니다. 웬만한 젊은이들도 겁낼 거인들이 사는 땅을 자신이 친히 가서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을 45년 동안 간직했고, 그것을 성취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청년으로 살 때 우리 모두 언제나 청춘입니다.

 

하물며 말 그대로 청년의 때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도전하고 해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비록 실패해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물론 요즘 청년들의 삶이 녹록지 않습니다. 청년 실업은 전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청년들 안에 분노가 쌓이고 스스로 인생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에 매진하면 분명히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전도서의 표현대로 떡을 물 위에 던지면 언젠가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10년 후, 그랜드 캐년에 다시 서서 사진을 찍는다면 그랜드 캐년은 그대로 있을 테지만 저는 지금보다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도 여전히 청춘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의 때를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청년으로 살기 원합니다. 갈렙처럼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믿음의 장부가 되기 원합니다. (2016년 5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비가 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따뜻하고 화창한 봄이 되면,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웃 나라에 힘을 과시하고, 재산이며 노비들을 탈취해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작은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므로 지속해서 조공을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다윗도 봄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니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다윗의 왕권은 대내외적으로 견고해졌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본뜬 다윗성을 예루살렘에 세웠고 하나님의 법궤도 모셔왔습니다. 하나님 역시 다윗은 물론 그의 후손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했습니다. 다윗에게 영적인 조언을 하던 나단 선지자가 다윗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이 문제였습니다. 인생의 골짜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고, 꼭대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더욱 겸손해야 하는데, 다윗 역시 뭇 왕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평정하면서 교만해졌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졌습니다.

 

어느 봄날, 다윗은 부하들만 전쟁에 내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며 한가롭게 지냅니다. 저녁 무렵 늦게 일어나서 지붕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와서 관계를 맺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위해서 전쟁에 나간 히타이트 출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부하의 아내, 외국인이면서도 다윗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수의 아내를 범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밧세바가 아기를 갖습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전쟁에 나간 우리아를 불러들여서 밧세바와 잠자리를 갖게 합니다. 우리아의 아이라고 위장하려는 것인데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는 다윗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죄에는 브레이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고사령관 요압을 시켜서 전투 중에 우리아만 두고 후퇴함으로 그를 죽게 합니다.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밧세바를 아내로 취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무척 사랑해서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이웃에는 양과 소를 많이 가진 부자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나그네 한 사람이 부자를 방문했을 때,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은 묻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그런 부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의로운 척합니다.

 

다윗 역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자기 식구처럼 양들을 사랑했고 맹수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낼 만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남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딱 두 글자 “you (are) the man” 이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양처럼 돌보라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는데, 부하의 아내를 범했고 그 부하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시치미 뚝 떼고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원래의 다윗이 아닙니다. 그가 변했습니다. 어느새 다윗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 즉 부자가 되어 있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에 즉각 응답하면서 자신을 추스릅니다.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무수한 말이 난무하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기 힘듭니다. 아니 그런 말을 일부러 외면합니다. 그렇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이야말로 양심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곧바로 인정했고 죗값도 톡톡히 치렀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머리가 쭈뼛섭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려놓으시려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주님의 은혜와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다시금,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신앙, 바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그 출발점입니다.(2016년 5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나무에 달리시다

한국에 있을 때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온 도시가 불을 밝히고 빨간색 십자가가 곳곳에 눈에 띄었습니다. 커다란 교회의 높은 십자가부터 여기저기 크고 작은 건물 위에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교회가 많이 있는데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곤 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일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구원하소서)”를 외친 이유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야만족들이 고안했고 나중에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형틀이었습니다. 죄수를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형틀에 달린 그를 저주합니다. 죄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서서히 죽어가고 그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에 부서져 내립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야만족들을 죽이는 방법으로는 사용될 수 있지만 절대로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달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달린 사람을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가 국가가 행하는 형틀이었다면, 구약의 율법에서 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사람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로마 황제를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했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율법을 따르면 저주받는 자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앞에 잡혀갔을 때,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절대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조롱거리였습니다. 율법을 믿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곳이기에 거리끼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이 달리는 나무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오죽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무에 달려서 우리가 받은 저주를 몸소 받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기꺼이 그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자랑이요 능력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었을까요? 예,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천 년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2016년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십자가를 건물 위에 높이 달 생각만 했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고,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기독교의 진리를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바꿨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살기로 재차 결심합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고귀한 사랑이 온 세상에 넘치길 기도합니다.(2016년 3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