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구두장이가 시골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척 가난해서 겨울이 되었지만, 아내에게 변변한 외투 하나도 선물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아내의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서 도시에 나갔지만, 가진 돈으로 술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술에 취한 시몬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청년이 교회앞에 맨몸으로 쓰러져 있습니다. 청년이 옷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교회 앞에 쓰러져 있었다는 톨스토이의 묘사에서 당시 러시아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 눈길을 주지 않았음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구두장이 시몬은 청년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외투를 입히고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시몬의 아내는 자신이 갖고 싶었던 외투는 그만두고 어디서 거지같은 청년을 데리고 온 남편을 구박합니다. 하지만 선한 마음씨를 가진 구두장이 부부는 오갈 데 없는 청년을 보살펴주고, 자신들의 구둣방에서 보조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미가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솜씨가 보통을 넘습니다. 어려운 구두도 척척 만들고 수선합니다.

 

하루는 시몬이 구두를 잘 만든다는 소문을 들은 한 부자가 하인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매우 비싼 가죽을 갖고 와서 까다로운 모양의 구두를 부탁했습니다. 만약에 부자의 요구대로 구두를 만들지 못하면 그를 감옥에 넣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시몬은 두려웠지만, 미가엘의 솜씨를 믿고 부자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미가엘이 그 비싼 가죽을 다 오려서 구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나 신을 법한 슬리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고 부자의 하인이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주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화처럼 목이 긴 구두 대신 시신이 신는 슬리퍼를 부탁했습니다. 시몬은 깜짝 놀랐고 청년 미가엘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한 부인이 쌍둥이 아이를 데리고 구두를 맞추러 왔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자초지종을 얘기해 줍니다. 쌍둥이는 부인의 이웃집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아빠가 죽고, 곧이어 엄마도 죽었는데 쓰러지면서 아이의 발을 눌러서 절게 되었답니다. 부인은 졸지에 부모를 잃은 두 아이가 불쌍해서 쌍둥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그 와중에 자기 아들이 죽고 이제는 두 아이를 친자식처럼 돌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쯤 해서 톨스토이는 구두장이 시몬이 구해준 청년 미가엘이 누구인지 공개합니다. 그의 이름이 알려주듯이 미가엘은 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맨몸으로 세상에 내려온 것입니다. 천사 미가엘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세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습니다.

 

천사 미가엘은 가난한 구두장이 시몬이 교회 앞에 쓰러진 자신에게 외투를 벗어주고 구둣방에서 일하게 해 준 것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를 푼 것입니다. 으름장을 놓으며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명령하던 부자가 집에 가는 길에 죽는 것을 보면서 사람에게는 앞길을 예측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두 번째 문제도 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웃집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는 부인을 보면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미가엘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주신 세 문제를 모두 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천상의 사랑입니다. 구두장이 시몬은 교회 앞에서 맨몸으로 쓰러져있던 청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셈입니다. 이웃집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키운 부인은 사람이 사랑으로 사는 것임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던 부자가 집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고 결국에는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때 소망이 생깁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뤄 가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소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2019년 2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새해를 맞으면 습관처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새해 신문을 모두 사서 훑어보았습니다. 신문마다 한 해를 전망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고, 새해 특별호는 분량이 평소의 서너 배가 되어서 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20대 초부터 해오던 습관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자기 사랑이라는 세 가지 큰 제목으로 나눈 후에 각각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스스로 점수를 매기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평가하곤 했습니다. 지나간 해를 돌아보면 아쉬운 것이 많았기에 저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야심 차게 새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20대 초반부터 계속하던 저의 새해 의례(ritual)였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꼼꼼하게 세웠던 계획들이 저의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분기마다 새해 계획을 점검하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50대 중반을 넘으면서 새해 계획을 더 이상 세우지 않습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저의 관점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쉼 없이 노력하며 살았다면, 50대 중반 이후의 삶은 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싶었습니다.

 

일찍이 제자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여전히 제가 성취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50대 중반을 넘으면서 제가 하려는 일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무장해제 시키는 작업입니다. 간구하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기도가 늘어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젊습니다. 인생이나 목회 길에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 양손에 꼭 붙들고 놓지 못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씩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전적인 항복의 순간을 맞겠지요. 그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성숙한 신앙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야곱은 집요한 인물입니다. 어디서든지 살아남을 꾀쟁이입니다. 장자가 되기 위해서 태중에서부터 싸우다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형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샀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주도 면밀한 계획을 쫓아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결국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장자가 되기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던 야곱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가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삼촌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야곱은 홀연 단신으로 삼촌 집을 향해서 떠납니다. 걸어서 한 달 이상 걸리는 여정입니다.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니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꾀쟁이어도 더이상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고,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후손들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길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념에 쌓인 채 우리 식으로 괴나리 봇짐을 지고 터덜터덜 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노숙했다는 말씀이 야곱의 처지를 잘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이 탄성을 지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돌베개를 세워놓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물론,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해 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더 큰 기쁨은 예상치 않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과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도하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쫓아가는 즐거움을 맛보기 원합니다. 올 한해를 살면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는 야곱의 탄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2019년 1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희망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무술년(戊戌年) 2018년이 지나갑니다. 올해의 최고 뉴스는 2월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된 한반도의 화해 분위기 조성일 것입니다. 올림픽 전까지는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 로켓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북한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는데, 동계 올림픽을 치르면서 남북 관계는 물론 미국과 북한의 관계도 화해 무드로 급격히 전환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들이 판문점과 평양에서 연이어 만나고,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만나는 극적인 순간도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70년 넘게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던 역사가 단숨에 뒤바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낭만일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올 한해 한반도에서 시작된 희망을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크게 두 가지 역사서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에 이르는 신명기 역사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해서 사사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까지 통일왕국을 이루다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고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유다는 바빌론에 무너지는 것을 기술한 역사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았습니다. 일찍이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왕조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북이스라엘은 그렇다 쳐도 남쪽의 다윗 왕조까지 무너진 것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고민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릴 수 있을지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장려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신명기를 기준으로 약속의 땅에 정착한 순간부터 마지막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과거의 역사를 꼼꼼하게 회고했습니다. 나라와 성전의 무너짐을 경험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절한 자기반성입니다.

 

신명기 역사서가 과거를 돌아보았다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쓰인 또 다른 역사서인 역대기는 미래를 향합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물론 창세기의 아담까지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해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생략하고 남유다 중심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남유다를 중심으로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기대와 희망입니다.

 

신명기 역사서와 달리 이스라엘의 흑역사를 대부분 생략한 채 밝은 면만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면, 역대기에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명기 역사서인 열왕기하에서는 남유다가 멸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왕이 므낫세인데, 역대기에는 므낫세가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소개합니다. 신명기가 왕을 비롯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대기는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의 계절에 지나온 한 해를 돌아봅니다. 연말이 되면서 한반도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소식에 뿌연 안개가 드리우는 분위기입니다. 다시 안개가 걷히고 민족의 염원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합니다. 개인적으로 한 해를 돌아보니 아쉽고 부끄러운 순간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여기저기 흑역사가 숨겨 있어서 구약성경의 신명기 역사가처럼 우리 자신을 낱낱이 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우리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앞에 펼쳐질 전인미답의 2019년 기해년(己亥年) 새해를 담대히 맞닥뜨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힘차게 새해를 맞이합시다.(2018년 12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소금언약

일찍이 소금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소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곳에 도시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육식을 하면 동물의 육질에서 우리 몸에 꼭 필요한 하루 1g 정도의 소금을 섭취할 수 있지만, 채식을 한다면 소금을 섭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소금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어서, 소금을 유통하는 업자들이 부를 축적했고 나중에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주관하고 세금을 매겼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소금으로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봉급에 해당하는 영어 샐러리(salary)가 나온 이유일 것입니다. 앞의 “살(sal)”이 소금을 뜻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샐러드, 살사, 소시지와 곁들이는 살라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상품성이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위에서 소금을 채취하거나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었던 천연 소금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화학 소금이 등장하면서 소금은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이 되었습니다.

 

소금이 우리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소라는 것 외에도 소금의 진가는 여러 곳에서 증명됩니다. 무엇보다, 부패를 막아줍니다. 맛을 냅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고 간이 맞지 않으면 산해진미도 입에서 뱅뱅 돌 뿐 넘어가질 않습니다. 소금은 나쁜 습관이나 부정을 막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행여나 이불에 실례를 하면 키를 머리에 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와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발길이 집에 들어오면 소금을 뿌려서 퇴치했습니다.

 

성경에도 소금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과 더불어 부패를 막고 세상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라는 부탁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길가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서는 곡식을 빻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룩이나 꿀은 곡식을 부패시키지만, 소금은 부패를 막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살아있는 것들의 기를 죽이듯이 서로 양보하면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부탁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기록한 구약성경 역대기서에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겼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다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비로소 이들은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금처럼 변함이 없으셨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재난을 당했으니 다시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는 상거래는 물론 계약을 맺을 때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소금을 위약금으로 걸거나, 계약 당사자가 소금을 친 음식을 먹으면서 상호 계약을 지킬 것을 약속했습니다. 소금 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친구 관계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소금의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에서 입술의 말에 소금을 치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말 저말 하지 말고 말에 책임지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변치 않는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소금 언약을 하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지만, 하나님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두고 사람들이 왈가왈부하지만, 하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소금 언약을 지키십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우리 역시 소금 언약을 마음에 품고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금 언약이 유효했기에 은혜로 맞는 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금처럼 변하지 않고 맛을 내는 신실한 믿음으로 응답하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감사절을 맞기 원합니다. (2018년 11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아리마대 요셉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읽기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아리마대는 요셉의 출신지이고, 그의 직업은 공회원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최고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테니 요한복음에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함께 높은 공직에 있던 인물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의장인 대제사장과 69명의 공회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 도시에도 공회가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공회는 예수님 당시 최고의 사법기관이었습니다. 그가 공회원이었다는 표현 하나만 갖고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을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숨은 제자로 보입니다. 단지, 그의 높은 지위와 명망으로 인해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의할 때 요셉은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밀고해서 잡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순간입니까? 누구보다 고급 정보를 알고 있던 아리마대 요셉이었기에 예수님께 대역죄인들에게 내려지는 십자가형이 선고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공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세를 거스른 용기입니다. 막판에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을 밝힌 셈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 외에 모든 제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것과 확실히 비교됩니다.

 

일이 잘되거나 소위 성공했을 때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 천명을 먹이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등 기적을 행하실 때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 외에도 칠십 인을 세우셔서 전도 훈련을 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일이 뒤틀리고 인생이 무너져 내리면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정말 진정한 친구들만 남게 마련입니다. 어려울 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 일에 찬성하지 않았고,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였습니다.

 

겉으로 신앙이 좋은 척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 예수님을 믿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연거푸 일어나서 간증한다고 앞에 나서지만 결국 자기 자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혼자 독식한 것처럼 우쭐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을 은근히 무시하는 분들도 종종 만납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은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에 문제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납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변함없이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을 묵묵히 실천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그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준 기독교의 ‘비범함’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처럼 교회와 기독교가 세상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때도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고 그릇된 교회의 모습만 비판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 말로 설득해서 복음을 전하는 시대가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행실을 세상에 보여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아리마대 요셉처럼 당당하게 예수님의 제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 원합니다. 힘들고 절망적일수록 부활의 소망을 마음에 품고 주의 길을 걷는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날 줄 믿습니다. (2018년 10월25일 SF종교칼럼)

속도를 낮춥시다

저는 그리 빨리 운전하는 편이 아닙니다. 제한속도를 지키거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한속도에서 10마일 이상을 넘기지 않습니다. 차선도 자주 바꾸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같은 차선을 달립니다. 옆에 있는 아내는 제 운전습관에 익숙하지만, 종종 운전을 아주(?) 잘하는 분께서 옆자리에 타시면 답답해하시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러면 장난기가 발동해서 슬쩍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선도 바꿔봅니다. 운전을 못 해서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전운전을 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한 속도를 지켜서 운전하는 것이 편합니다. 속도를 내면서 급하게 달려가도 나중에 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고 자칫 교통 티켓에 벌금 폭탄을 맞기 십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는 뜨거운 커피가 내려오는데도 손으로 종이컵을 잡고 기다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일종의 조급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서두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뒤처졌다고 느끼거나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위해서 경쟁심이 발동할 때 서두르게 됩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초조감도 한몫 합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면 실수하게 되고 자칫 서두른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적합한 속도로 주어진 인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곁눈질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분은 그의 책 <소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부르심을 쫓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스 기니스의 말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과 세상을 의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은 사람의 칭찬처럼 귓전을 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뤄가는 소명을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조급할 때 그렇습니다.

 

조급하게 세상을 쫓아가느라 애쓰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삶의 속도를 낮춰보는 것입니다.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인생의 엔진을 완전히 끄고 쉼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가서 삶을 돌아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침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힘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삶을 조율합니다. 침착하게 자신이 가야 할 인생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속도를 조절합니다. 속도를 낮추고 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다른 책 <인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이자, 기업가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소명의 핵심이다.”

 

어느덧 올해도 석 달 남았습니다. 세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조급해집니다. 그동안 최고의 속도로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남은 석 달은 속도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마음껏 즐기고 음미해 봅시다. 유일하신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창의적이고 아름답고 알찬 인생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018년 9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네 가지 밭

성경을 한 장씩 차례로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유명한 누가복음 본문을 만났습니다. 공관복음서로 알려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씨를 심기보다 옆구리에 망태기를 메고 손으로 휙휙 뿌리는 식이었답니다. 그러니 씨가 여기저기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읽다 보면, 씨를 뿌리는 농부보다 말씀을 뜻하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이 강조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농부가 뿌린 씨는 길가, 바위,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각각 떨어졌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공중의 새가 와서 쪼아먹었습니다.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싹은 났지만, 습기가 없는 바위 위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강력한 가시나무가 기운을 막으니 크게 자라지 못했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이 백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길가는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갔습니다. 바위는 기쁨으로 말씀을 듣지만, 시련이 닥치니 말씀을 저버리고 배반했습니다. 가시덤불은 신앙의 성장을 막는 염려, 물질, 쾌락입니다. 가시덤불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밀물처럼 몰려오고, 마음속에서 바이러스처럼 생기는 염려는 복음의 씨가 자라는 것을 막습니다. 염려를 완전히 떨칠 수 없지만, 염려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께 맡기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므로 염려를 몰아내야 합니다. 계속해서 염려가 몰려오니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의 두 번째 요소인 재물은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신앙 성장을 방해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그 자체가 시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한지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재물이 많으면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거나, 재물에 노예가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대형교회의 문제들 대부분이 재물과 관련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에 이어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쾌락은 하나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갑니다. 쾌락만큼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어릴 적 꿀단지에서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가 며칠 지나면 한 단지를 모두 훔쳐 먹듯이 쾌락은 슬며시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마음과 삶을 소리소문없이 망가뜨립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뻐하고 즐긴다면 그 모든 것이 쾌락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이 등장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착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좋은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원수까지 사랑하고 미운 자를 위해 기도하며, 약한 자를 돕는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니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씨가 뿌려진 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도자의 책임은 단지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려주고,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밭에 비유하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가 되길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밭을 우리 각자의 마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네 가지 밭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한결같이 좋은 밭일 수 없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길가도 있고, 다른 편에는 바위는 물론 가시덤불이 넓게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갈아엎는 훈련이고 과정입니다.

 

때로는 네 가지 밭이 차례로 또는 두서없이 나타납니다. 마음 전체가 길가와 같아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 그리고 쾌락에 빠져서 가시덤불로 뒤덮일 때도 있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해서 우리 마음 전체가 좋은 밭일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좋은 밭이 오래가도록 신앙의 끈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순례길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갖고 주어진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감사와 기쁨으로 완주하기 원합니다. (2018년 8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가룟 유다

교회의 젊은 기혼 그룹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다루고 싶은 주제를 신청받았더니 가룟 유다가 나왔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에 관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흔치 않기에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 관한 공부를 함께 해보니 생각할 것도 많고 예상치 않은 은혜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예수님을 팔아버린 배신의 아이콘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출신이었는데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대로 구약시대 (남)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 출신입니다. “가룟(Iscariot)”이라는 명칭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엇갈립니다. 당시에 “시카리”라고 불리던 로마 요원 암살 단체의 일원일 가능성부터 그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지명이라는 의견, 히브리어 어원으로 유추하면 “사기꾼”이라는 별칭이 후대에 붙여졌을 가능성까지 다양합니다.

 

가룟 유다는 신약성경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그의 죽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마다 가룟 유다를 다루는 관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넘겨주고 배신하는 과정은 물론 그의 최후까지 기록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유다가 스스로 목을 매서 죽었다는 기록은 마태복음이 유일합니다.

 

마가복음은 가룟 유다보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마저 버림받고 외롭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누가복음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그에게 사단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마태복음이 가룟 유다의 마지막 죽음(배신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누가복음은 배신의 원인을 강조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관심을 끄는 성경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은 복잡미묘합니다.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을 인물로 규정하기 때문에 자칫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예정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돈궤를 맡고 있었고, 종종 돈을 훔쳐 간 것을 놓고 그를 도둑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에서도 가룟 유다가 세 번 등장하는데 가장 관심을 끄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셨고 “떡 조각을 받은 후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다”(요13:27)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대충 읽으면 예수님께서 떡을 주셨기에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으로 들립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지요.

 

저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건네주신 것과 사단이 들어갔다는 말씀 사이에 간격을 두고 읽을 것을 권합니다.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건네 주신 것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사람을 챙기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애절한 마음을 발견합니다.

 

떡 한 조각과 함께 공은 유다에게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떡을 받아먹으면서 예수님을 팔기로 계획한 것을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그 순간, 사단이 그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예수님의 최후통첩이 들어있다고 보았습니다. 네가 할 일은 회개이니 얼른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촉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 자리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때는 아주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칠흑 같은 죽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노예 한 명 가격에 불과한 은 삼십에 3년간 스승으로 모시던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를 보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인 사단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돈을 관리하던 그에게 사단은 돈으로 찾아가서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을 뒤늦게나마 뉘우쳤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그 품에 안겨 한없이 울고 회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룟 유다를 통해서 실감나게 배웁니다.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복된 인생입니다.(2018년 3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해시태그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단어나 용어들도 생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시태그”입니다. 해시태그라는 말은 1970년대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2007년에 크리스 메시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에 “#표시를 사용해서 (필요한 정보를) 묶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해시태그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의사소통 기호입니다. 파운드로 알려진 # 기호를 맨 앞에 쓰고 강조하고 싶거나 반복되는 단어나 표현을 붙여 쓰는 일종의 표기법입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해시태그를 사용한 단어나 표현을 클릭하면 그와 유사한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검색되는 편리함도 제공합니다.

 

2007년 가을, 남가주 일대를 뒤덮었던 샌디에이고 산불을 알리는데 해시태그가 사용된 것이 유명합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는 단순히 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사회적인 이슈를 알리거나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리는데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캠페인 역시 해시태그를 통해서 소셜미디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해시태그 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주제어에 맞춰서 분류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마태복음 10장을 읽는 중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된 열두 제자의 이름은 가룟 유다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는 “곧 예수를 판 자라”는 부연설명이 붙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건만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라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며 “#예수를판자”라는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이나 해시태그에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를 해시태그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임”이라는 해시태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그만 이민 교회 목사로서 교회의 살림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언제나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여기까지 목사의 자리를 지킨 것도 책임감이 제일 컸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이 꽤 크게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을 근사하게 감당한 것이 아니기에 책임 다음에는 “#언제나부족”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야 합니다.

 

다른 분들이 저를 두고 해시태그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를 사용할까도 생각해 보니 흥미롭고 꽤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분들의 해시태그가 거울을 보듯이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니 저에 대한 하나님의 해시태그도 궁금했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물론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해시태그를 받는 것이 행복한 인생일 테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해서도 해시태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서 진행 중인 남북대화가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지길 우리 모두 바라고 있습니다. 지뢰밭처럼 여러 가지 변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그 결과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없기에 “#평화” “#민족통일” 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고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총격 사고가 나서 여덟 명의 학생과 두 명의 교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2월 플로리다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격 사고 이후 학생들까지 나서서 총기규제를 외치고 있지만, 정부의 대처는 느리고 총격 사고는 계속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속한총기규제”라는 해시태그를 아주 큰 글씨로 여기저기 달아놓고 싶습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를 사용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 수 있고 세상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쁜 꼬리표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기분 좋은 해시태그들이 줄지어 생겨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스며든 편견

체격이 크신 흑인 목사님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 매장이나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할 때면 꼭 추가 심문을 받는답니다. 성직자를 표시하는 옷을 입고 있으면 무사통과인데, 조금 허름한 일상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경계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느낀답니다. 우리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애환을 갖고 계셨습니다.

 

지난 3월 새크라멘토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흑인 청년에게 20발의 총격을 가해서 청년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고 절도를 시도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할머니 집 뒤뜰에 있던 한 흑인 청년을 발견했고, 실제 범인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총으로 오인해서 총격을 가한 것입니다. 경찰 보고에 의하면 청년이 자신들을 향해서 걸어왔다고 했지만, 총탄이 흑인 청년의 등에 집중된 것이 부검결과 밝혀졌습니다. 무장한 경찰이 흑인 청년의 등에 총을 쏜 셈입니다. 경찰의 과잉 대응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고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어떤 상황이나 이슈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몸집이 큰 흑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 흑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이나 머리빗을 총이나 칼로 생각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서툰 영어로 인해서 은근히 무시 받는 이민 생활의 애환도 암묵적 편견의 희생물일 수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암묵적 편견을 갖고 있고, 많은 경우 의식하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보다 자신 안에 은연중에 스며든 치우친 생각으로 사람을 대하고 상황을 판단한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암묵적 편견을 알아보는 테스트도 있었습니다. 피부 색깔, 인종, 나이, 성적지향 등에 관한 암묵적 편견을 검사하는 웹사이트였습니다. 피부 색깔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검사를 시작했더니 검은 피부에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 얼굴이 검은 편이고 늘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부러워했기에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저 자신을 사랑하고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이웃을 대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의식적이든 아니면 암묵적이든 편견은 떨쳐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바라는 욕심이고 집착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심지어 적대시할 가능성도 큽니다. 만약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손에 쥔다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성경에서 강조하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새크라멘토의 경찰 총격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피부 색깔에 따른 암묵적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세워둔 기준을 갖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평가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고, 마음속의 편견을 동원해서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편을 가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편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모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않던 죄인, 세리, 병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친구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명작 <오만과 편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기대로 바꾸기 원합니다.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오만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하기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서로 배우고, 희망과 기대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길 꿈꾸기 원합니다. (2018년 4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