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태그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단어나 용어들도 생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시태그”입니다. 해시태그라는 말은 1970년대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2007년에 크리스 메시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에 “#표시를 사용해서 (필요한 정보를) 묶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해시태그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의사소통 기호입니다. 파운드로 알려진 # 기호를 맨 앞에 쓰고 강조하고 싶거나 반복되는 단어나 표현을 붙여 쓰는 일종의 표기법입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해시태그를 사용한 단어나 표현을 클릭하면 그와 유사한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검색되는 편리함도 제공합니다.

 

2007년 가을, 남가주 일대를 뒤덮었던 샌디에이고 산불을 알리는데 해시태그가 사용된 것이 유명합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는 단순히 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사회적인 이슈를 알리거나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리는데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캠페인 역시 해시태그를 통해서 소셜미디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해시태그 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주제어에 맞춰서 분류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마태복음 10장을 읽는 중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된 열두 제자의 이름은 가룟 유다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는 “곧 예수를 판 자라”는 부연설명이 붙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건만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라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며 “#예수를판자”라는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이나 해시태그에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를 해시태그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임”이라는 해시태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그만 이민 교회 목사로서 교회의 살림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언제나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여기까지 목사의 자리를 지킨 것도 책임감이 제일 컸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이 꽤 크게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을 근사하게 감당한 것이 아니기에 책임 다음에는 “#언제나부족”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야 합니다.

 

다른 분들이 저를 두고 해시태그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를 사용할까도 생각해 보니 흥미롭고 꽤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분들의 해시태그가 거울을 보듯이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니 저에 대한 하나님의 해시태그도 궁금했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물론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해시태그를 받는 것이 행복한 인생일 테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해서도 해시태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서 진행 중인 남북대화가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지길 우리 모두 바라고 있습니다. 지뢰밭처럼 여러 가지 변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그 결과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없기에 “#평화” “#민족통일” 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고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총격 사고가 나서 여덟 명의 학생과 두 명의 교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2월 플로리다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격 사고 이후 학생들까지 나서서 총기규제를 외치고 있지만, 정부의 대처는 느리고 총격 사고는 계속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속한총기규제”라는 해시태그를 아주 큰 글씨로 여기저기 달아놓고 싶습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를 사용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 수 있고 세상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쁜 꼬리표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기분 좋은 해시태그들이 줄지어 생겨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스며든 편견

체격이 크신 흑인 목사님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 매장이나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할 때면 꼭 추가 심문을 받는답니다. 성직자를 표시하는 옷을 입고 있으면 무사통과인데, 조금 허름한 일상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경계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느낀답니다. 우리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애환을 갖고 계셨습니다.

 

지난 3월 새크라멘토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흑인 청년에게 20발의 총격을 가해서 청년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고 절도를 시도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할머니 집 뒤뜰에 있던 한 흑인 청년을 발견했고, 실제 범인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총으로 오인해서 총격을 가한 것입니다. 경찰 보고에 의하면 청년이 자신들을 향해서 걸어왔다고 했지만, 총탄이 흑인 청년의 등에 집중된 것이 부검결과 밝혀졌습니다. 무장한 경찰이 흑인 청년의 등에 총을 쏜 셈입니다. 경찰의 과잉 대응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고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어떤 상황이나 이슈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몸집이 큰 흑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 흑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이나 머리빗을 총이나 칼로 생각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서툰 영어로 인해서 은근히 무시 받는 이민 생활의 애환도 암묵적 편견의 희생물일 수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암묵적 편견을 갖고 있고, 많은 경우 의식하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보다 자신 안에 은연중에 스며든 치우친 생각으로 사람을 대하고 상황을 판단한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암묵적 편견을 알아보는 테스트도 있었습니다. 피부 색깔, 인종, 나이, 성적지향 등에 관한 암묵적 편견을 검사하는 웹사이트였습니다. 피부 색깔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검사를 시작했더니 검은 피부에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 얼굴이 검은 편이고 늘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부러워했기에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저 자신을 사랑하고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이웃을 대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의식적이든 아니면 암묵적이든 편견은 떨쳐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바라는 욕심이고 집착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심지어 적대시할 가능성도 큽니다. 만약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손에 쥔다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성경에서 강조하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새크라멘토의 경찰 총격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피부 색깔에 따른 암묵적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세워둔 기준을 갖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평가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고, 마음속의 편견을 동원해서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편을 가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편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모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않던 죄인, 세리, 병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친구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명작 <오만과 편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기대로 바꾸기 원합니다.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오만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하기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서로 배우고, 희망과 기대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길 꿈꾸기 원합니다. (2018년 4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되새기면서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저항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하시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신 희생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6세기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그렸습니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배교할 정도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피해서 외딴섬을 옮겨 다니면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은혜와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판명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쉬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판자를 밟으면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밟았지만, 십자가에 침을 뱉으라는 요구에 불복해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금방 숨을 거두었지만, 며칠을 십자가에 매달려서 파도와 싸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나는 하나님 나라로 간다네” 찬송하면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서 장엄하게 순교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과연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남은 자들을 무조건 배신자라고 몰아칠 수 있는지, 핍박과 순교의 시대에 하나님의 침묵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 수많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신앙을 어느 한 가지로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음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우쳐줍니다.

 

소설의 제목 <침묵>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목숨을 잃는데도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보고만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그 답을 줍니다:“나는 너희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쉽게 말하고 쉽게 결심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신앙과 동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자초한 어려움을 두고 자기 십자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멈춰서 생각해보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어렵고 고민스러운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나서자마자 부딪치는 질문과 문제,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말을 섣불리 입 밖에 내기 어렵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결국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솔직한 고백이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 같은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주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진정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과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2018년 3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언제까지니까

발런타인데이 학교에 간 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하고 이리저리 딸을 찾아다녔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이 범인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총격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예쁘고 인기가 많았던 제이미에 대한 사연입니다. 제이미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들은 그녀의 페이스북에 끝없는 추모의 글을 올리며 제이미가 세상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슬퍼했습니다. 부모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로 밝혀진 열아홉 살 청년이 반자동 연발 소총을 발사해서 열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AR-15 소총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죽음의 기계”라고 불리던 무기입니다. 한 번에 열 발 이상을 발사할 수 있어서 코네티컷의 뉴타운 초등학교, 캘리포니아의 샌버나디노, 라스베이거스 총격 사건에 사용되었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플로리다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있던 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티브 커 코치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총에 맞아 희생당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콘서트가 열리는 곳과 영화관에서 총을 쏴도 상관이 없나 봅니다.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서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미국 총기 협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의원들을 국회로 보내면 안 됩니다. 수백억 달러를 들여서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는 어리석은 일을 멈추고 우리 아이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자동 소총을 규제하는 일을 하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다소 긴 인터뷰를 제가 요약했습니다. 스티브 커의 인터뷰를 실은 칼럼에서는 스포츠인들은 물론 유명인들이 나서서 정치권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총기협회는 물론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총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거듭 주장합니다. 총기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총기 사용을 억제 또는 금지하는 것은 자위권에 대한 헌법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총기규제를 반대하고 미국 총기 협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정치인들의 일관된 태도입니다.

 

작년에 텍사스 서덜랜드 조그만 교회에서 스물일곱 명이 목숨을 잃는 총격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의 저명한 상하원의원들이 잇따라 희생자를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기도한다(praying)”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총기협회로부터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야말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위선적 기도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총기협회 정치 자금을 끊고 총기 규제를 해야 합니다. 말로만 기도하고 뒤로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긴다면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분노하셨던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루가 멀다 않고 미국에서는 총격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침에 밝게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간 자녀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생명이 귀하니 단순비교는 조심스럽지만, 미국이 참전한 아프가니스탄에서 2001년부터 현재까지 목숨을 잃은 민간인이 삼만 천명이고 삼천 명 정도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 해 동안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숫자는 만오천 명이 넘습니다. 총기로 자살하는 숫자까지 더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입니다.

 

하루속히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미국이 안전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메시지에, 시애틀 씨호크의 풋볼 선수 볼드윈의 “예, 말은 그럴듯하지만, 학생도 교사도 그 누구도 절대로 안전하지 않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하십시오, 정신 차리십시오”라는 리트윗이 마음을 칩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합니다. 학교에 금속탐지기라도 설치해 달라는 희생자 어머니의 외침에 귀 기울일 시점입니다. 저절로 탄식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니까?” (2018년 2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성경통독

 아침에 일어나면 카톡 메시지가 수십 개 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단체 카톡방에 보낸 메시지들입니다. 카톡을 무음으로 해놓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카톡 카톡”하는 소리에 잠을 설칠뻔 했습니다. 카톡이 미국은 물론 한국과 전 세계를 이어주면서 우리 대부분 다반사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카톡에 일일이 답변해야 하고, 행여나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상대방이 읽고도 답변하지 않을 때는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등 귀찮고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카톡이 주는 유익이 꽤 많습니다. 저에게는 그중에 하나가 카톡을 통한 성경 통독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카톡방을 개설해서 자원하는 교인들과 성경을 읽었습니다. 일 년 통독 스케줄에 맞춰서 서로 격려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질문하고 제가 답변합니다. 매주 읽을 분량을 알려드리면서 해당 본문에 대해서 간단히 안내해 드립니다. 카톡이 주는 혜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에 서너 장씩 읽으면 일 년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데, 혼자서는 중간에 길을 잃고 포기하기 십상입니다. 곳곳에 성경 통독을 힘겹게 하는 복병들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새해 첫 달부터 맞게 되는 구약성경의 레위기가 대표적입니다. 지루하다 못해 그냥 건너뛰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읽다 보면 진도가 나갑니다. 성경 통독 한 가운데서 만나는 구약성경의 시편은 행여나 그동안 밀린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두 달 가까이 시편의 은혜로운 말씀에 푹- 잠겨서 여름을 보냅니다. 그다음에 만나는 가장 큰 복병은 이사야로 시작되는 대예언서입니다. 각각의 장이 꽤 길고 이스라엘의 죄악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덩달아 화도 나지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내용도 어렵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예언서라는 큰 고비만 넘으면 그다음부터는 탄탄대로입니다. 완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성경 통독이 주는 유익이 꽤 큽니다. 우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를 읽었다는 기쁨입니다. 성경 통독을 끝냈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마지막 구절을 카톡방에 올리면서 함께 느끼는 쾌감이 있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후에 찾아오는 감사와 보람은 통독하신 분들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둘째로, 성경 통독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펼쳐진 성경의 여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걷게 만듭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는 성경의 일부만 다룹니다. 대개 은혜로운 본문들이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미 익숙한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공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성경 통독은 불모지와 같은 성경의 숨은 본문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그 거친 말씀까지 읽고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셋째로. 일 년에 한 번씩 성경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성경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성경의 줄거리가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지난주에는 3년째 성경 통독반에 참여한 노권사님께서 이제 성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을 조각조각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묘사된 하나님의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통독 자체가 매우 좋은 신앙 훈련입니다. 하루에 서너 장씩 꾸준히 성경을 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읽어야 할 분량이 눈덩이처럼 쌓여서 날을 잡아서 따라잡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처지고 맙니다. 일 년에 성경을 통독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관리를 했다는 표시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함은 물론 규칙적으로 섭취했다는 뜻입니다.

 

어느덧 새해 첫 달이 지나갑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한 성경 일독은 그 힘들다는 레위기에 와 있습니다. 힘차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그랬듯이 우리의 삶도 금방 거친 광야 길에 접어들 수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한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올 한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처럼 한해의 여정을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걷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성경 통독을 권합니다. (2018년 1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비트코인

언제부터인지 비트코인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자꾸 언론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7년 전, 플로리다에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핸예츠라는 사람은 비트코인 일 만개로 피자 두 판을 시켜 먹었습니다. 인터넷에서 거래되는 가상화폐 비트코인으로 실제 물건값을 지급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비트코인은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일본명을 가진 사람이 발견해서 이듬해 모든 이에게 정보를 공유한 인터넷상의 암호화된 화폐이자 금융 결제 수단입니다. 블록체인이라는 보안기술을 활용해서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보관하고, 정부나 은행 등 기존 금융기관의 간섭 없이 비트코인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일대일로 거래를 일으키는 말 그대로 가상 화폐입니다.

 

지난 10년여 꾸준히 사용되더니 현재는 세계 곳곳에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최근에는 극심한 투기 조짐까지 보입니다. 물론 무한정 판이 커지지 않도록 2100만의 비트코인 발행치를 정해 놓았지만, 각각의 금액을 최소 단위로 분할 가능하기에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습니다. 블록체인이 강력한 보안체계라고 불리지만, 누구나 관여할 수 있는 개방형 시스템을 갖고 있기에 해킹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비트코인을 금융 결제나 거래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 주식 거래하듯이 사고팔면서 단기 차익의 투기가 성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대일 거래 방식이어서 개인 간에 사고파는 가격만 맞으면 인터넷상에서 즉시 체결됩니다. 가격 변동 폭이 하루에 20%를 넘길 때도 있습니다. 만 불을 투자해서 비트코인을 구입했다면 하루에 2천 불의 손익이 가능한 구조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의 비트코인 거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답니다. 돈을 놓고 돈을 먹는 투기로 변질될까 심히 우려됩니다. 게다가 50-60대 은퇴자를 대상으로 비트코인을 위장한 사기까지 판을 치고 있다니 큰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로리다의 프로그래머가 비트코인 일 만개로 피자를 사지 않고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십 년도 안돼서 일억천만불 이상의 재산가가 되었을 테니 비트코인에 한번 발을 담그면 그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교활한 사단이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가진 것보다 갖지 않은 것,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 주어진 것보다 뭔가 파격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유혹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 이래 인간의 본성에 침투한 것 같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되려는 아담의 욕심과 비트코인을 사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의 탐욕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너무 심한 비유가 될는지요!

 

목회자 남편을 둔 아내는 언제나 센트까지 살펴 가면서 물건을 삽니다. 때로는 개스 값이 더 들것 같은데도 세일하는 물건을 찾아가고 정말 ‘작은동전(비트코인)’ 하나만 아껴도 얼굴이 금세 밝아집니다. 제 아내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센트까지 아껴가면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아니 평생 작은 동전을 아끼면서 자식을 뒷바라지했고 힘겨운 이민 생활을 견뎠습니다.

 

돌아보면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비트코인 열풍을 쫓아서 땀흘리지 않고 몇십 배의 이익을 만들어내려는 욕심이나,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교만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 땀 한 땀 수놓듯이 한 해를 살아온 우리가 최고로 부자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7년 12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땡큐(thank you)”입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웬만한 상황만 되면 “땡큐”를 연발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의아했습니다. 마트에서 조금만 양보해도,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해도, 심지어 상대방의 호의를 점잖게 거절할 때도 앞에 노(no)를 붙여서 “땡큐”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땡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20여 년 미국에 살다 보니 제 입에서도 땡큐가 저절로 나옵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땡큐가 나와서 겸연쩍을 때도 있었습니다.

 

감사는 표현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다”인데, 이 단어는 “던지다” “고백하다”는 동사에서 발전했습니다. 감사는 던지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표출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때 감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3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여보/당신을 못합니다. 처음부터 호칭을 정리하지 않으니 저는 아내를 “아무개 엄마”로 큰 애 이름을 앞에 넣어서 부릅니다. 미국 사람들의 애정 어린 호칭이나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사랑은 물론 감사의 표현도 서툽니다. 미국에 살면서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더 연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속에 간직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배웠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진심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왠지 경망스럽게 느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즘 젊은이들의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력에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허물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젊은 세대가 솔직히 부럽습니다.

 

물론,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감사는 속이 빈 강정과 같습니다. 아이작 월튼이라는 영국 작가는 하나님께서 두 개의 처소를 갖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속에 있답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축복이 이미 다가오고 있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속담도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감사하는 마음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마음의 감사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 스쳐 지나간 인연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이 진리일 정도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손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 식구들, 꼭 필요할 때 함께 해 준 이웃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두 번의 도움을 받았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지속되던 관계가 아쉽게 끝났어도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신세진 것이 많아서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감사절을 맞습니다. 지난 주간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면 추수감사절인 오늘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하기 원합니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이름도 없이 도움을 준 손길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해피 땡스기빙! (2017년 11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그리스도인의 자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말틴 루터 역시 운명적으로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20년 세 개의 논문을 연거푸 발표합니다. 첫번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을 피력합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그 이후로 뜨겁게 전개된 성만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자신을 파문시키려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말틴 루터의 사상을 잘 담고 있는 주옥같은 글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율법의 틀에 가둬두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경에 반하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주장했습니다. 말틴 루터 자신도 탑의 경험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 안에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단지 손님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낯선 의,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죄와 율법 그리고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에서 밝힌 첫 번째 명제 대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가 논문에서 밝히 두 번째 명제는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종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는 억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면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외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말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원했습니다:“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라고 그의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자칫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알려주듯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한 걸음 나가서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길 원합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고귀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2016년 10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일각천금(一刻千金)

고사성어 일각천금(一刻千金)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의 “춘야(春夜,봄밤)”라는 시에 등장합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날씨가 풀리더니 온 세상에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로운 봄날에 함께 모여서 거문고를 타며 한판 흥겨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이 되자 모두 집으로 돌아간 정자에 시인은 홀로 남아서 여유롭고 한가로운 봄밤의 정취를 노래합니다. 잠깐 지나가는 봄입니다. 봄꽃도 금방 지고, 정자에 모여서 함께 놀던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귀한 봄날입니다. 이처럼 소동파의 시 춘야는 낮의 흥겨움과 봄밤의 고요함을 비교하면서 잠깐 지나가는 봄날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일각은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입니다. “일각천금”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천금과 같다는 뜻입니다. “시간은 금”이라는 서양 속담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쳐 지나가듯이 지나갈 한 해의 봄을 마음껏 즐기자는 권면입니다. 단 15분이라도 허비하지 말고 천금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라는 교훈입니다.

 

아내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아기 손 같은 새잎이 가지마다 돋아나던 봄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낙엽이 길가에 뒹굴고 있습니다. 아직은 여전히 젊지만, 50대 중반이 되니 시간이 제법 빠르게 지나갑니다. 제 마음은 여전히 춘삼월 봄철에 있는데 벌써 9월이 다 지나고 올해도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주일을 맞고 중간에 수요 예배를 마치면 한 주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살다 보면 한 달이 금세 지나가서 달력을 또 한 장 넘깁니다. 앞으로 남은 석 달도 순식간에 지날 것 같습니다. 소동파의 “일각천금”이 생각납니다. 15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도 천금과 같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알차게 사용해야 합니다. 아니 15분의 시간을 천금의 가치로 만들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헬라어를 통해서 시간을 설명합니다. 우선,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삽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사건 중심의 시간으로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가 아침을 맞고 저녁이 되면서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과 한 달 그리고 한 해가 지나가는 식이라면, 카이로스는 각자가 의미 있게 꾸며가는 시간입니다. 단지 주어진 시간이 아닙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건들로 가득 채워진 창조적 현재입니다. 시간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아무리 무병장수를 해도 삶 속에 카이로스적인 사건이 부족하다면, 구약성경 전도서 기자가 한탄하듯이 헛되고 헛된 인생입니다.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넘쳐난다면, 카이로스의 시간대를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크로노스의 흘러감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의미 있는 추억과 사건들로 채워지길 원합니다.

 

신약성경의 시간대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 진다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때”가 중요합니다. “그 날” “주의 날” 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때는 구원과 심판이 갈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주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와 함께 걷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걸으면서 깨알같은 간증과 고백들이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경고하듯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섬기고, 거짓되고 자기 잇속만 챙기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무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때는 심판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재앙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소동파의 말대로 15분이 천금과 같습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의미로 가득 찬 카이로스와 하나님의 때를 살면서 주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일각(一刻)에 비하면 앞으로 남은 석 달은 꽤 많은 시간입니다.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건들로 이어지며,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후회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넉넉함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2017년 9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샐러드 보울

지난 8월 12일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의 후폭풍이 미국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반대편 시위자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나치 사상에 물든 한 청년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서 20대의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물론 곳곳에 남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동상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대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남부 연합의 사상이 깃들어 있거나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하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공장소가 아닌 박물관 또는 특정 장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로 발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 등 백인 편향으로 보이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냅니다.

 

중서부를 비롯한 백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에게 “미국을 떠나라(get out of America)”는 구호와 함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강하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는 LA에서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백인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예정되었던 샌프란시스코의 극우단체 “패트리엇 프레이어”의 집회가 논란 끝에 취소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폭력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뒤숭숭합니다. 이미 4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학창시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께서는 미국을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라는 그릇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소개된 개념이니 백인 중심의 유럽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멜팅 팟”보다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녹아내려서 하나가 된 미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물이 같은 접시에 들어있는 샐러드처럼, 각각의 문화, 인종, 관습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미국이라는 그릇 속에 어우러진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만화경을 뜻하는 영어 표현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도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아름답다(beautiful)”에 “모양(form)”을 합친 말입니다. 다른 배경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샐러드 보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워야 할 미국이 많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KKK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물론 나치의 깃발을 들고 폭력을 일삼는 네오 나치 단체까지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혐오 범죄”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고, 폭언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총격을 가하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염소와 어린아이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 경계하고 안타까워할 일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일삼고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마음으로라도 동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인들처럼 보이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미국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화합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됨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멜팅 팟처럼 하나로 녹아질 수는 없지만, 샐러드 보울처럼 각자 제 맛을 내면서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각각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7년 8월 3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