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땡큐(thank you)”입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웬만한 상황만 되면 “땡큐”를 연발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의아했습니다. 마트에서 조금만 양보해도,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해도, 심지어 상대방의 호의를 점잖게 거절할 때도 앞에 노(no)를 붙여서 “땡큐”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땡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20여 년 미국에 살다 보니 제 입에서도 땡큐가 저절로 나옵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땡큐가 나와서 겸연쩍을 때도 있었습니다.

 

감사는 표현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다”인데, 이 단어는 “던지다” “고백하다”는 동사에서 발전했습니다. 감사는 던지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표출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때 감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3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여보/당신을 못합니다. 처음부터 호칭을 정리하지 않으니 저는 아내를 “아무개 엄마”로 큰 애 이름을 앞에 넣어서 부릅니다. 미국 사람들의 애정 어린 호칭이나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사랑은 물론 감사의 표현도 서툽니다. 미국에 살면서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더 연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속에 간직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배웠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진심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왠지 경망스럽게 느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즘 젊은이들의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력에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허물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젊은 세대가 솔직히 부럽습니다.

 

물론,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감사는 속이 빈 강정과 같습니다. 아이작 월튼이라는 영국 작가는 하나님께서 두 개의 처소를 갖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속에 있답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축복이 이미 다가오고 있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속담도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감사하는 마음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마음의 감사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 스쳐 지나간 인연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이 진리일 정도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손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 식구들, 꼭 필요할 때 함께 해 준 이웃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두 번의 도움을 받았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지속되던 관계가 아쉽게 끝났어도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신세진 것이 많아서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감사절을 맞습니다. 지난 주간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면 추수감사절인 오늘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하기 원합니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이름도 없이 도움을 준 손길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해피 땡스기빙! (2017년 11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그리스도인의 자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말틴 루터 역시 운명적으로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20년 세 개의 논문을 연거푸 발표합니다. 첫번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을 피력합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그 이후로 뜨겁게 전개된 성만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자신을 파문시키려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말틴 루터의 사상을 잘 담고 있는 주옥같은 글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율법의 틀에 가둬두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경에 반하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주장했습니다. 말틴 루터 자신도 탑의 경험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 안에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단지 손님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낯선 의,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죄와 율법 그리고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에서 밝힌 첫 번째 명제 대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가 논문에서 밝히 두 번째 명제는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종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는 억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면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외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말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원했습니다:“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라고 그의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자칫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알려주듯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한 걸음 나가서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길 원합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고귀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2016년 10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일각천금(一刻千金)

고사성어 일각천금(一刻千金)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의 “춘야(春夜,봄밤)”라는 시에 등장합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날씨가 풀리더니 온 세상에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로운 봄날에 함께 모여서 거문고를 타며 한판 흥겨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이 되자 모두 집으로 돌아간 정자에 시인은 홀로 남아서 여유롭고 한가로운 봄밤의 정취를 노래합니다. 잠깐 지나가는 봄입니다. 봄꽃도 금방 지고, 정자에 모여서 함께 놀던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귀한 봄날입니다. 이처럼 소동파의 시 춘야는 낮의 흥겨움과 봄밤의 고요함을 비교하면서 잠깐 지나가는 봄날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일각은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입니다. “일각천금”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천금과 같다는 뜻입니다. “시간은 금”이라는 서양 속담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쳐 지나가듯이 지나갈 한 해의 봄을 마음껏 즐기자는 권면입니다. 단 15분이라도 허비하지 말고 천금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라는 교훈입니다.

 

아내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아기 손 같은 새잎이 가지마다 돋아나던 봄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낙엽이 길가에 뒹굴고 있습니다. 아직은 여전히 젊지만, 50대 중반이 되니 시간이 제법 빠르게 지나갑니다. 제 마음은 여전히 춘삼월 봄철에 있는데 벌써 9월이 다 지나고 올해도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주일을 맞고 중간에 수요 예배를 마치면 한 주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살다 보면 한 달이 금세 지나가서 달력을 또 한 장 넘깁니다. 앞으로 남은 석 달도 순식간에 지날 것 같습니다. 소동파의 “일각천금”이 생각납니다. 15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도 천금과 같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알차게 사용해야 합니다. 아니 15분의 시간을 천금의 가치로 만들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헬라어를 통해서 시간을 설명합니다. 우선,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삽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사건 중심의 시간으로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가 아침을 맞고 저녁이 되면서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과 한 달 그리고 한 해가 지나가는 식이라면, 카이로스는 각자가 의미 있게 꾸며가는 시간입니다. 단지 주어진 시간이 아닙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건들로 가득 채워진 창조적 현재입니다. 시간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아무리 무병장수를 해도 삶 속에 카이로스적인 사건이 부족하다면, 구약성경 전도서 기자가 한탄하듯이 헛되고 헛된 인생입니다.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넘쳐난다면, 카이로스의 시간대를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크로노스의 흘러감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의미 있는 추억과 사건들로 채워지길 원합니다.

 

신약성경의 시간대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 진다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때”가 중요합니다. “그 날” “주의 날” 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때는 구원과 심판이 갈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주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와 함께 걷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걸으면서 깨알같은 간증과 고백들이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경고하듯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섬기고, 거짓되고 자기 잇속만 챙기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무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때는 심판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재앙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소동파의 말대로 15분이 천금과 같습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의미로 가득 찬 카이로스와 하나님의 때를 살면서 주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일각(一刻)에 비하면 앞으로 남은 석 달은 꽤 많은 시간입니다.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건들로 이어지며,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후회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넉넉함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2017년 9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샐러드 보울

지난 8월 12일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의 후폭풍이 미국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반대편 시위자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나치 사상에 물든 한 청년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서 20대의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물론 곳곳에 남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동상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대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남부 연합의 사상이 깃들어 있거나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하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공장소가 아닌 박물관 또는 특정 장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로 발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 등 백인 편향으로 보이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냅니다.

 

중서부를 비롯한 백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에게 “미국을 떠나라(get out of America)”는 구호와 함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강하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는 LA에서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백인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예정되었던 샌프란시스코의 극우단체 “패트리엇 프레이어”의 집회가 논란 끝에 취소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폭력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뒤숭숭합니다. 이미 4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학창시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께서는 미국을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라는 그릇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소개된 개념이니 백인 중심의 유럽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멜팅 팟”보다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녹아내려서 하나가 된 미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물이 같은 접시에 들어있는 샐러드처럼, 각각의 문화, 인종, 관습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미국이라는 그릇 속에 어우러진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만화경을 뜻하는 영어 표현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도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아름답다(beautiful)”에 “모양(form)”을 합친 말입니다. 다른 배경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샐러드 보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워야 할 미국이 많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KKK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물론 나치의 깃발을 들고 폭력을 일삼는 네오 나치 단체까지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혐오 범죄”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고, 폭언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총격을 가하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염소와 어린아이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 경계하고 안타까워할 일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일삼고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마음으로라도 동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인들처럼 보이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미국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화합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됨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멜팅 팟처럼 하나로 녹아질 수는 없지만, 샐러드 보울처럼 각자 제 맛을 내면서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각각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7년 8월 3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에벳멜렉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심판이 임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든지 멸망의 순간이 닥치면, 무능한 왕이 들어서고 그를 보좌해야 할 관리들은 파당을 짓고 권력 다툼을 하게 마련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우유부단했습니다. 신하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체포해서 데려왔을 때, 자기 생각을 말하지도 못한 채 예레미야를 신하들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신하들은 예레미야를 진흙 웅덩이에 던졌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였습니다.

 

그때 왕궁에 에벳멜렉이라는 에티오피아 출신 내시가 있었습니다. 에벳멜렉은 “왕의 신하”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이주해서 왕을 섬기는 신하가 된 것 같습니다. 신하들 간에 암투가 심하니 시드기야 왕이 외국인을 고용해서 이름을 바꿔주고 시중들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에티오피아 출신입니다. 게다가 환관인 내시였습니다. 사람은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두 가지 커다란 결격 사유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왕궁에 있던 에벳멜렉은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혀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왕까지 쥐고 흔드는 신하들이 꾸민 일입니다. 에벳멜렉이 용기를 내서 시드기야 왕 앞에 나갑니다. 신하들이 예레미야에게 악한 일을 한 것이고, 성안에 먹을 것이 없으니 웅덩이에 갇힌 예레미야는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알립니다.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가만히 왕의 시중만 들면 되는데, 자기와 상관도 없는 예레미야를 살리기 위해서 소위 총대를 멘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을 예비해 놓으신 듯합니다.

 

에벳멜렉이 왕이 보낸 군사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웅덩이에 갇힌 예레미야를 구해냈습니다. 예레미야가 완전히 석방되지 못한 채 왕이 관할하는 감옥으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은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출신 내시 에벳멜렉의 도움이 없었으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신하들이 파놓은 웅덩이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인 에벳멜렉이 나선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구레네 출신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 준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인 것도 떠오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의외의 인물을 통해서 일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에벳멜렉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에벳멜렉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행한 의로운 행동만이 그를 살린 것은 아닙니다.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에티오피아 출신 내시 에벳멜렉은 예루살렘에서 몇 안 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라고 조롱할 때,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임을 확신하였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예레미야를 웅덩이에서 구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신과 성분 등 차별없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봅니다.

 

우리 역시 시시때때로 돕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믿을만한 지인이 나서서 도와주길 은근히 기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곤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입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꼭 필요한 순간에 에벳멜렉과 같은 은인을 만나길 기대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에벳멜렉이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에 참여합니다. 예레미야를 구출한 에벳멜렉처럼 우리 역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은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에벳멜렉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길 기대하시고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017년 7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써브웨이에서

 

20여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우리 가족은 맥도날드에 가서 더블 치즈버거를 즐겨 먹었습니다. 유학생으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니 더블 치즈버거를 시켜서 여덟 개의 치즈버거를 아이들 중심으로 네 식구가 배불리 나눠 먹었습니다. 지금도 맥도날드를 보면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고 가끔 들려서 치즈버거를 시켜 먹곤 합니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온 후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인앤아웃 햄버거에 매료되었습니다. 매장이 집 가까이 있어서 여차하면 인앤아웃 치즈버거를 시켜서 집으로 가져옵니다. 아이들에게 배운 대로 토스트와 양파를 추가로 살짝 구워 달라고 자신 있게 주문할 정도입니다.

 

인앤아웃의 반열에 들지 못해도 그 다음으로 자주 찾는 곳은 써브웨이입니다. 써브웨이는 인앤아웃과 달리 긴 샌드위치 하나만 시켜도 아내와 넉넉히 나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샌드위치 안에 들어갈 갖가지 내용물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채소까지 많아서 왠지 건강식처럼 느껴집니다.

 

지난 두 주 동안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신앙과 생활의 조화입니다. 신앙만 좋다고 거룩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거룩함을 떠올리면 위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나 신앙 행위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아래를 향합니다. 야고보서에서 알려주듯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이 참된 신앙이고 거룩입니다. 교회에서의 예배와 헌신을 통해서 거룩함이 시작된다면, 삶의 현장에서 거룩이 실천되고 완성됩니다. 거룩에 삶이 동반되지 않으면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위선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얼마 전에 먹었던 써브웨이 샌드위치가 생각났습니다. 샌드위치를 주문하려면 먼저 샌드위치를 감싸줄 빵을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대개 윗트(wheat) 브레드를 즐겨 먹습니다. 진열대를 쭉 지나가면서 샌드위치 안에 들어갈 내용물을 고릅니다. 미식가가 아니어서 무엇을 선택해도 맛있지만, 채소 위주로 내용물을 채웁니다. 그러면 상냥한 직원이 눈인사를 하고는 밀로 만든 빵에 제가 선택한 내용물을 모두 넣고 돌돌 말아서 건네줍니다.

 

그러고 보니 내용물을 감싸주는 빵이 매우 중요합니다. 빵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선택했어도 담을 수 없고 모두 흘러내려서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빵이 내용물을 꼭 잡아 줍니다. 샌드위치를 감싸는 빵을 신앙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붙잡아 주고 지탱하는 기둥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처음과 끝입니다.

 

빵 안에 들어갈 내용물도 중요합니다. 겉을 감싸는 빵만 있고 내용물이 하나도 없다면 샌드위치로서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행여나 내용물이 부실하다면, 샌드위치를 먹는 내내 아쉬움이 찾아오고 본전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샌드위치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샌드위치를 시킬 때,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내용물을 선택하듯이 삶의 모습 자체가 샌드위치 내용물만큼이나 다채롭고 가지각색입니다. 그것을 선택하고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신앙과 더불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삶으로 알차게 채워진다면 말 그대로 신앙과 생활의 일치 즉 거룩함의 길을 걷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합니다. 공동체 예배는 다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각자의 삶을 하나님 말씀으로 재정비하는 시간입니다. 주유소와 같아서 영적인 기름을 가득 채우는 시간입니다. 그러고 나서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다음 주일에 다시 모일 때까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힘차게 살아갑니다. 주일이 써브웨이 샌드위치를 잡아주는 빵이라면, 6일간의 삶은 그 안에 들어갈 내용물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일상 속에서 채워지고 완성됩니다. 말투와 행동이 신사적이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매사에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임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가 된다면 최고의 신앙입니다. 거룩함이 신앙과 삶의 통합인 것을 써브웨이 샌드위치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2017년 6월 22일SF한국일보 종교칼럼)

 

 

 

 

왕업 kingship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습니다. 미국에 산 지 20년이 가까워져 오지만 지난번처럼 미국 정치에 관심을 두고 결과를 지켜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반년이 다가오지만, 좌충우돌은 물론 탄핵까지 언급되는 등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는데 지도자의 모습 속에서 귀감과 품격을 찾기 힘드니 안타깝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난 몇 개월처럼 조국 대한민국의 정치에 관심을 갖고 신문을 꼼꼼히 읽고 뉴스를 챙겨본 적도 없습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국정 농간으로 중간에 대통령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론이 갈리고 선거기간에도 막말이 오가는 등 한국 정치에서도 품격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서 깜깜한 밤하늘을 비추는 달처럼 허니문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약속한 대로 통합과 협치를 이루려는 행보에 80퍼센트가 넘는 국민이 박수를 보냅니다. 누구나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면 높은 지지를 받고 시작합니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직이야말로 직임을 마치고 내려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이 정말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약 성경에 왕의 직무에 대한 지침이 나옵니다. 원래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고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때는 사사(士師)들이 백성을 재판하고 국가를 다스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웃 나라처럼 왕을 세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왕을 세우면 나라가 더욱 강해지고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았습니다. 결국, 백성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왕이 세워지면 그들이 백성을 위해서 일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래도 백성들은 왕을 세우면 자신들을 잘 다스리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 대신에 여느 민족처럼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구약성경 신명기 (17:14-20)에서 왕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만큼 왕업(kingship)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왕으로 세워야 합니다. 타국인은 왕이 될 수 없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과 그들이 섬기는 점쟁이를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병마를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과도한 군비경쟁이나 전쟁을 피하라는 명령입니다. 셋째로,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쌓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두면 쾌락에 빠지고 도덕성을 상실합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재산을 축적해도 안 됩니다. 왕이야말로 청렴해야 합니다. 왕의 자리는 사리사욕을 챙기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율법서를 옆에 두고, 평생 배우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법과 규칙을 무시한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 안 됩니다. 왕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비롯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평생 동안 겸손히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교만해져서 백성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통치한 왕들은 다윗과 요시야를 비롯해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왕업을 끝까지 수행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신명기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의와 정의가 아닌 다른 것을 우상처럼 섬기면 안 됩니다. 자기 관리에 엄격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합니다.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가 사는 미국의 대통령이 자신에게 위임된 왕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길 기도합니다. (2017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리턴없는 인생

몇 달 전, 동네 창고형 매장에서 아내가 사놓은 물건이 있었습니다. 친지에게 선물하려고 구입했는데 그만 시간을 놓쳐서 선물도 못하고 우리가 쓰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 데다 물건을 살 때 받았던 영수증도 잃어버렸습니다. 빠듯한 살림에 아내의 시름이 깊어 갑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제가 용기를 내서 리턴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구매한 시간도 3개월 가까이 지났고 영수증까지 없으니 거절당할 것 같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물건을 가지고 매장을 찾았습니다.

 

입구에서 반납할 물건임을 확인한 후, 담당 직원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 날은 웬일인지 기다리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금방 우리 차례가 닥쳤습니다. 차라리 줄이나 길었으면 직원들이 무심코 처리할 법도 한데 줄까지 짧으니 마음이 더욱 졸여왔습니다. 세 명의 직원 가운데 매니저처럼 보이는 분이 걸렸습니다. 예상대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분은 저희가 산 물건을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물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 그대로입니다. 영수증은 있냐고 묻습니다. 없다고 했더니 권총처럼 생긴 레이저건으로 물건을 스캔합니다. 구입한 날짜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인데 저와 아내에게는 꽤 길게 느꼈습니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초록색 영수증을 주면서 제 카드로 입금되었답니다. 싱거울 정도로 리턴이 쉬웠습니다. 누구보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진작 가져올 걸 괜스레 집에 두고 속앓이를 한 셈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미국은 리턴의 나라인 것 같습니다. 옷가지를 구입했다가 한두 번 입고 리턴한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들었습니다. 몇 개월을 잘 쓰던 전자기기를 리턴하고 신제품으로 바꿔오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리턴이 이처럼 쉽게 이뤄지다 보니 물건을 구입하면서 “맘에 들지 않으면 리턴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지만, 물건을 만들고 대형 매장에 출품한 업체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겠습니다.

 

너무 손쉽게 물건을 리턴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인생도 리턴이 가능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고 아내가 묻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고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습니다. 50대 중반이 되면 남편이 약자가 되고 아내가 올라서기 시작한다는데 제가 너무 눈치없이 군림했나 싶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면서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아내는 말 그대로 인생 자체를 생각하며 질문한 것인데 제가 괜히 넘겨짚고 긴장한 것입니다.

 

인생길에 리턴은 없습니다. 리턴은 고사하고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무서운 것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째깍째깍 소리 내며 가고 있는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과 초침이랍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만, 그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번뿐인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갈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리턴이 없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현재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에 선물(present)이라는 뜻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24시간이라는 선물이 매일같이 주어집니다. 이 세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브랜뉴, 새날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 하얀 백지와 같아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힘을 다해서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날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리턴도 불가능한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가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해가 뜨니 오늘과 내일이 같은 날이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습니다. 리턴이 편리한 나라에 살다 보니 인생도 리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리턴할 수 없어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리턴할 수 없기에 더욱 귀한 인생길을 걷고 싶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내 인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도 한 번뿐임을 알고 이웃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리턴 없는 인생길을 사랑으로 걷기 원합니다. (2017년 4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봄이 오는 소리

올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던 때를 잊어버린 채, 하루가 멀다 않고 내리는 비에 약간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캘리포니아의 가뭄이 거의 해갈되었다니 감사할 일입니다.

 

매일같이 흐리고 비가 올 것만 같더니 지난 주간에는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기온도 꽤 많이 올라가서 한낮에는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길가 가로수들의 가지마다 아기 손처럼 연한 잎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세상 밖으로 피어났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계절을 좇아 어김없이 싹을 내고 한 해를 준비하는 자연 만물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도 만납니다.

 

봄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농부들은 봄철에 씨를 뿌리면서 한 해 농사를 시작합니다. 세상 만물들도 싹을 틔우면서 한해살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봄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왔다가 수줍은 듯 뒷문으로 금세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칠 봄을 느끼려면 우리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붙들어 매 놓을 수 없기에 순간순간 봄기운을 만끽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봄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해방된 때가 봄이었습니다. 고집스러운 이집트의 바로 왕은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내리시는 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던 히브리 민족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비극적인 열 번째 재앙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룻밤에 이집트의 장자는 물론 짐승의 첫 번째 새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집트에 대재앙이 내리던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집트를 휩쓸고 간 죽음의 사자는 어린양의 피가 묻혀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건너뛰었습니다. 유월절(逾越節,pass-over)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밤에 재산과 생필품을 모두 챙겨서 이집트를 빠져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그 해의 첫 달로 정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시작점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있는 첫 달을 “아빕월”이라고 부릅니다. 곡식이 싹을 틔운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달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압제와 학대가 판을 쳤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 왔음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신약성경의 봄 역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더불어 찾아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발라놓은 어린 양의 피를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듯이,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듯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해방되는 자유함을 누립니다. 겨우내 땅속에 묻혀 있던 씨가 새싹을 틔우듯이 이전 것이 지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처럼 계절의 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봄도 매년 맞이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한가운데 서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힘있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죄에 사로잡혀 있던 옛 것들로부터 해방될 새날과 새 시대를 기대합니다.

 

새봄에는 거짓과 폭력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진리와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온 세상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봄을 마음껏 느끼고 싶습니다. 귀를 기울여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맞춰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사순절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부활의 주님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고 싶습니다.(2017년 3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히브리어 “타밈”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뉴스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어난 최신 소식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전하는 것인데 그 앞에 가짜가 붙었습니다. 영어 표현을 빌리면 옥시모론(oxymoron, 모순 어법)으로 들립니다. 공개된 비밀(open secret)이란 말이 성립될 수 없듯이 엄밀히 보면 “가짜 뉴스”는 모순 어법입니다. 뉴스에 가짜가 붙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이 꽤 어지럽습니다. 가짜 뉴스 때문인지 사람들의 마음이 갈리고 있습니다. 한마음과 한 뜻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마음이 둘로 셋으로 갈려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윗사람부터 자기 마음대로 진실을 왜곡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목적을 이루면 된다는 식입니다. 일단 권력만 잡으면 어떤 것도 숨길 수 있고 자기식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심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 가짜 뉴스까지 합세하니 서로를 향한 불신이 더해집니다.

 

구약 성경 잠언 19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것을 요즘 세상에 적용하면, 가짜 뉴스를 생산해 내고 거짓을 일삼는 행위를 가리킬 것입니다. 가난해도 성실한 것은 세상의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되게 살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에서 “성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톰”입니다. 동사로 쓰이면 “타맘”이라고 발음하고 형용사는 “타밈”이라고 읽습니다. 잠언에서 성실로 번역된 “타밈”의 의미는 무엇보다 완전한 것입니다. 시작한 일을 말끔하게 끝맺는 것이 타밈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대충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맡겨진 일을 끝내느라 모든 힘을 쏟아서 소진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의 완벽함이 타밈입니다.

 

히브리어 타밈은 잠언 말씀대로 성실을 뜻합니다. 몸과 마음이 균형을 이루는 건강함도 타밈입니다. 불의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입술로 남을 저주하거나 몹쓸 말을 쏟아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 앞에서 신실합니다. 우직하게 의로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믿을만하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마음과 행동이 똑같이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타밈은 진실을 뜻합니다. 앞뒤가 같습니다. 겉과 속이 같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다. 억지로 핑계를 대거나, 거짓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짓을 일삼고 다른 이들까지 속이려 하지만, 타밈 속에는 거짓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가짜라는 말은 얼씬도 할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정직과 성실이 짝을 이뤄서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가짜 뉴스가 퍼지는 것은 세상에 타밈이 실종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뉴스 앞에 가짜가 붙을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서로 연결된 요즘 세상에서 누군가 가짜 뉴스를 생산해서 퍼뜨린다면, 우리는 매번 뉴스의 사실 여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번거롭고 시간 낭비입니까? 행여나 정보에 어두운 분들은 가짜 뉴스를 사실로 믿고 그것을 추종할 수도 있습니다.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약속이자 중요한 가치인 신뢰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진실이 가짜 뉴스에 가리게 될 가능성도 큽니다. 세상이 얼마나 어지럽게 변하겠습니까? 타밈을 가로막는 가짜와 거짓은 하루속히 근절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입술과 행동이 물러가고 <타밈>이 온전히 세워지길 원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도 타밈이 실종되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할 지 언정 진실된 세상을 만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진실(타밈)된 것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삶에도 타밈이 임하길 원합니다. 처음과 끝이 같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조화를 이루고, 거짓 없이 진실한 타밈의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와 같은 모순 어법이 사라지고 진실만이 인정받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7년 2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