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예배의 교독문은
시편 104편이었습니다.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대비되는
시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에 좋은 선한 창조였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묘사하는데
그 표현이 구수하고 소박합니다.
아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처럼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감수성이
시편 104편 속에 깃들어 있어서
읽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2.
시편 104편이 묘사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몇 가지 창조 세계의 모습들입니다.
천천히 눈에 그리면서 읽으면, 말씀이 그림 언어로 다가옵니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3절)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8절)

 

“그가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13절)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삶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20절)

 

게다가, 시편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0절).

 

3.
성경은 그림책으로 말하면
흑백이 아닌 천연색의 다채로운 그림입니다.
밝은 색깔, 어두운 색깔,
기쁜 색깔, 우울한 색깔,
감사한 색깔, 불평과 탄식의 색깔
– 이 모든 것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하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너무 딱딱하지 않게
객관적인 또는 과학적인 진실에 얽매이지 않고
시편 104편 말씀처럼,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양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속에 푹 빠지고
말씀 속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하나님,
말씀의 바다에 풍덩 온 몸을 담그는 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7 이-메일 목회 서신)

끄덕끄덕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라는 말은
“레위인과 관련된”이라는 뜻의 라틴어
<레비티쿠스 Leviticus>에서 왔습니다.
영어도 제목도 <Leviticus>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 또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서
광야 시대에는 성막에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의를 전담했습니다.

 

레위기는 제목에 걸맞게
레위인들 즉 제사장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규정들이 많습니다.

 

2.
지난 3주 동안 배운 레위기 첫 세 장에는
소, 염소와 양 그리고 새를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burnt offering)
곡식을 빻거나, 조리해서 드리는 소제(grain offering)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화목제(peace offering)가 나옵니다.

 

희생 제물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에
소와 양에게 안수하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는 물론, 우리 자신을 제물에게 이전시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매우 세심했습니다.
제물을 직접 죽이고 (죽음은 꼭 필요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됨)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정성껏 분리해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소, 양과 염소, 새,
그리고 곡식까지 다양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대가족이나 부족의 경우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서민은 새나 곡식을 갖고 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리든지
레위기에서 알려주는 절차를 지켜서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가 됩니다.
제물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내장의 기름(당시는 최상의 것)과
콩팥(고대 사회에서는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함),
그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하고
화목 제사를 드린 당사자들이 나눠 먹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에
거룩한 제물을 갖고
다 함께 모여서 기쁨의 식탁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4.
레위기의 제사법들은
우리 신앙이 과하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임을 알려줍니다.

 

신앙을 지나치게 신비롭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다가
상식과 합리성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2:2)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러우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0 이-메일 목회 서신)

재난 가운데

1.
지난 주말,
조국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참사가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벗고 맞이한 핼러윈 주말에
150명이 넘는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핼러윈 날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독교인들은
감정이입 없이 나름 냉철하게(?) 이태원 참사를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 핼러윈을 지킬까? 왜 그곳에 갔을까? 쯧쯧”

 

물론, 내 자식이, 형제자매가, 친구가 그곳에 가서 희생되었다면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180도 바뀌었겠지요.
조금 미숙하고 이기적 관점입니다.

 

사고 전체를 관망하듯이 보지 말고
사고 속으로 들어가서
희생당한 분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세심함이 요청됩니다.

 

2.
하루는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난 특별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그럴 만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비통한 일을 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들, 죄가 작아서(없어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죽은 사람들에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누구든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실로암 망대 사고를 아실 정도로
시사에 밝으셨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커서 죽었겠냐고 반문하시면서
“No, 아니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없는 재난입니다.
일종의 사고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죽은 사람에게 죄인 프레임을 씌우고
살아있는 자신들이 의로운 척,
무엇보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멋쩍어서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3.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누구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같이 망하리라”)은
사고와 희생으로 죽은 특정한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가는 죽음의 길을 가리킵니다.

 

재난 또는 사고를 보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길을 떠올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를 두고,
빌라도와 같은 악한 인물이 사라지는 것,
실로암 망대를 허술하게 지은 건축가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찍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기억합니다(눅13:6-9).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임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자연재해 또는 사고와 같은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두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커다란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완전한 쾌유가 임해서
더욱 씩씩하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5)

 

하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3 이-메일 목회 서신)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20여 년 전
아미쉬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비포장도로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주민들이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빨랫감 같은 것을 등에 지고 가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집 옆에는 염소 같은 가축우리가 있었습니다.

 

문명의 이기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삶을 고수하는 아미쉬들이
왠지 안ㅆ,러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결정으로 아미쉬가 된
청년들과 아이들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습니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아미쉬의 생활 방식이 옳다고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2.
엊그제 유튜브 첫 화면에
3백만 뷰가 넘은 아미쉬 마을 영상이 등장했습니다.

 

70여 명의 아미쉬 마을 청년들이
힘을 합쳐서 큰 건물을 옮기는 장면이었습니다.
수십명의 청년들이 특별히 고안된 구조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서
큰 건물을 옮기는데 왠지 그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비슷했지만,
머리에 최신식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신나게 건물 이동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20-30대 청년 같았습니다.

 

20여 년 전 아미쉬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그곳에 사는 분들이 왠지 안쓰러웠는데
유튜브 영상에서 본 아미쉬 청년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3.
그때만 해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에 관한 기준이 분명했습니다.
일종의 고정관념입니다.

 

20여 년이 지나고, 팬데믹을 거치면서
개인의 삶이 중요해졌습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만의 개성있는 삶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미쉬 마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미쉬를 비롯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내부인의 시각과 외부인의 시각,
또는 편집된 유튜브 영상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

 

4.
수십 명이 수작업으로 건물을 옮기는
아미쉬 청년들을 보면서 교회 공동체를 생각했습니다.

 

참빛 식구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획일적인 신앙과 삶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각각 지체들의 개성 있는 신앙과 삶을 존중합니다.

 

동시에 아미쉬 마을 청년들이 건물을 옮기는 데 힘을 합치듯이
함께 이뤄 가야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힘을 합칩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라고 할까요!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빌론의 다니엘이 그랬고
이집트의 요셉이 그랬듯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삶을 사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4)

 

하나님,
각자의 자리에서 멋지게 살고
모이면 힘을 합쳐서 멋진 공동체를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7 이-메일 목회 서신)

착각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몸이 편치 않으셔서
예배에 오지 못하시던 권사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목사님, 얼굴이 마르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체중에 변화가 없는데 아무래도 머리숱이 적어지고
얼굴에 살짝 주름이 생기니 말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종종 듣는 인사말이어서
권사님 말씀이 새삼스럽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젊었을 때의 모습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육십 대의 모습이 새록새록 나타납니다.

 

사진을 찍으면
상상하던 제 모습이 아니라
젊은(?) 노인이 사진 속에 있습니다.
자연스레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ㅎㅎ

 

세월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2.
지난 주일에
교회 식구들과 축구 경기를 했습니다.

 

하루라도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운동이 축구이기에
교회 정리를 아내에게 맡기고 운동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 차는 것을 즐깁니다.
공을 찰 수 있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간이니까요!

 

어느덧 우리 자녀들이 커서 제법 공을 잘 찹니다.
축구 클럽에서 공차는 법을 배운 아이들은
발 재간까지 좋습니다.

 

팬데믹 전만 해도
아빠를 귀찮게 하던 아이들인데
이제는 아빠와 함께 경기에 몰입합니다.
축구 실력이 이제 곧 아빠들을 추월할 기세입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마음은 펄펄 날고 싶지만,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공을 찬 다음 며칠 동안 찾아오는
온몸의 통증을 생각하면 달리다가도 발이 멈춥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새로운 세대가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늘 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3.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제가 젊은 줄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공을 차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착각입니다.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모습도 기우뚱기우뚱,
그리고 헛발질이 잦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엇박자를 내면 안 됩니다.
젊은이가 노인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도,
노인이 여기저기 참견하며 수선을 떠는 것도
착각이고 엇박자입니다.

 

솔직한 자기 모습,
자기가 처한 환경과 처지를 알아내고
그에게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일 것입니다.

 

매사에 때가 있다는 전도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1)

 

하나님,
주님께서 보내신 자리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0 이-메일 목회 서신)

설렘

좋은 아침입니다.

 

1.
10월 9일,
지난 주일은
한국식으로 한글날이었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해서
1446년 9월에 발표한 우리나라 고유의 말입니다.

 

오랫동안 한글은
하류 계층이나 사용하는 언문(諺文)이라고 불리면서
한문에 비해서 크게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연산군은 그의 학정을 고발하는 투서가
한글로 작성된 것을 빌미로 한글 사용을 금지한 적도 있습니다.

 

한글이 우리 겨레의 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입니다.
우리 말 대신에 일본 말을 써야 하는 것에 위기를 느낀
주시경을 비롯한 한글 학자들이 한글 사용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번역했던 존 로스 선교사는
영어를 본떠서 한글 띄어쓰기를 개발했고
선교사들이 한글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면서
한글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한글은 매우 우수한 글자요 말입니다.
대부분의 표현을 기록하고 말할 수 있는 소리 언어입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우리 민족만 사용하는 우리 언어입니다.

 

2.
지난 주일 예배에서
제가 좋아하는 우리말 한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설렘”이었습니다.

 

설렘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림”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좋아서 몸과 마음이 들썩거리는 모습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처음 한글을 만들고 얼마나 설레었을까요?
양반들이 쓰는 한문을 몰랐던 천민 계급의 백성들이
한글을 익혀서 글을 쓸 수 있을 때도 꽤 설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결과가 기대한 대로 나왔을 때,
인생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게 되었을 때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무엇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한 제목이 응답되는 신비로운 순간에도
설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3.
언어가 다 그렇다고 하지만,
요즘은 한글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줄임 말이 사용되고,
앞에 상스러워 보이는 표현을 붙여서
매우 좋다고 말하고,
외래어와 섞여서 한글 특유의 맛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말, 한글이 아름답게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말과 글이 중요한
“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음도 감사한 일입니다.
올 가을에는 하나님 말씀을 더욱 가까이합시다.

 

아무쪼록
반듯하고 한결같은 ‘또바기’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잠20:15)

 

하나님,
우리 입술에서 아름다운 말,
살리는 말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13 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의 발견

좋은 아침입니다.

 

1.

벌써 두세 달이 지난 것 같습니다.

TV 아침 방송을 틀어 놓고 일하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말과 함께 화면에 등장했습니다.

 

신기해서 볼륨을 높이고 시청했더니

남가주에 사는 할로(Harlow)라는 소녀로

말에게 주는 먹이(간식)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로는 집에서 피터 팬이라고 이름을 붙인

조랑말(pony)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학교 과제 가운데 하나로

자기가 키우는 조랑말 피터 팬에게 줄 간식을 개발해서 발표했고

그것을 사업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일상의 발견입니다.

 

할로의 웹사이트에 가면,

사람이 먹어도 될 것 같은 조랑말 간식을 진열해 놓고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조랑말을 위한 간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순수 자연산 재료로 만들었답니다.

 

가격은 저렴하지 않습니다.

 

2.

방송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

매우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랑말을 집에서 키우는 것부터,

조랑말 애호가들이 전국적으로 꽤 많은 것 같고

열 개도 되지 않는 간식 한 상자가 20불이 넘는데도

판매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상품성이 있어도 어린아이의 제품이라면 무시하기 일쑤인데

초등학생이 만드는 조랑말 간식을 구매하고

그것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미국은 겉모습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기업가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땅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3.

할로는

자기가 키우는 조랑말 피터 팬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숙제를 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할 수도 있는 학교 숙제입니다.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지루한 일상인데

할로는 즐겁고 특별한 일로 발전시켰습니다.

 

일상은 소홀히 하거나 지나치기 쉽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일을 찾아내기 힘듭니다.

그러니 학교 숙제를 비즈니스로 만든 할로가 더욱 대단해 보입니다.

 

어느덧 10월이 되었으니 올해도 석 달 남짓 남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속에 깃든 특별한 의미를 포착해 내기 원합니다.

무채색처럼 지루할 만한 일상을

다채롭고 특별한 일로 바꾸는 일상의 발견을 기대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말씀과 기도 역시

일상으로 보이기 쉬운데,

그 안에 숨겨진 은혜를 찾아가면서

남은 석 달을 새록새록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어 봅시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니라 (전9:10)

 

 

하나님,

무심코 지나칠 일상 속에

숨겨진 보석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다움

좋은 아침입니다.

 

1.

9월 초 미국의 퓨 리서치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20년 현재

미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64%인데

앞으로 점점 줄어서

50년 후에는 절반 이하로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2007년 통계만 해도

미국의 기독교 인구는 70% 이상이었습니다.

10년 만에 10%가 줄었습니다.

동시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무종교 비율이

15%에서 30%로 늘었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도

50대 이상에 기독교인이 많아서 그렇지

30대 이하의 젊은 층으로 내려가면 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 층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크리스천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침에 나누는 말씀 묵상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수된 것이 떠오릅니다.

 

2.

올해 한국의 각 교단이 집계한 통계에서

교인 숫자가 수십만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으니

미국의 추세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할까요?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요즘 세대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아닌 물질로 대표되는 세속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데 당장 도움이 되지 않으니

문명의 이기나 새로운 기술을 쫓아갑니다.

가치보다 실용이 우선입니다.

 

시대 상황 외에도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회가 매력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배타적인 집단,

사랑을 외치는 그리스도인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3.

그렇다고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처음 불렸듯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인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독특함을 다시 생각하고

그것을 밀도 있게 간직하고 믿는 것입니다.

3% 정도의 소금기(염도)가 바닷물을 짜게 하듯이

반듯하고 품격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가치 있고, 행복하며, 생명의 길임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많이 묵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장착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걷는 <예수 닮기>를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참빛 식구들의 모습을 눈에 그립니다.

참빛 식구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임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 함께 “그리스도인다움”의 덕목을 회복합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9이-메일 목회 서신)

다양한 시각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 행렬이 지날 때
길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너도나도 셀폰을 꺼내서
사진찍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아빠의 어깨에 올라가서,
양손으로 셀폰을 받치면서 사진찍는 모습이
마지막 가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향해서
경배를 표하는 모습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누구나 갖고 읽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셀폰에 성경 앱을 다운로드 받아서
손쉽게 성경을 읽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성경책 대신에
양손에 셀폰을 들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성경이 대중의 손에 들어온 것은
15세기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그전까지 성경은
가톨릭 사제들만 소장했고 읽고 설교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독일어를 비롯한 자국어로 번역하면서
개신교인들이 성경을 직접 읽게 된 것입니다.

 

2.
성경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말씀도
읽는 독자들과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각기 다른 의미로 찾아옵니다.

 

어릴 적에 읽을 때와
어른이 되어서 읽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힘들 때 읽을 때와 편안할 때 읽는 성경이 다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여러 맥락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3.
수많은 사람의 셀폰에 담긴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전체적인 장례 행렬을 담았는지,
70년 이상 여왕이 갖고 있던 통치의 상징 홀(scepter)
또는 왕관만 찍었을 지,
각자가 위치한 자리와 관심사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함이 우선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유니폼을 입고 하나 됨을 과시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주요 신문이 전하는 몇 가지 사진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다양합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회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참빛교회도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양한 참빛 식구들의 재능과 은사,
삶과 성품을 드러내고 그것이 발휘되길 돕고 싶습니다.

 

다양함이 모여서
모자이크처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화를 이루는
멋진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갑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6)

 

하나님,
삼위 하나님의 다양함과 하나 됨이
우리 안에도 그대로 임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2이-메일 목회 서신)

인생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9월 8일,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영국 국왕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16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 조지 6세에 이어서
1952년에 국왕이 되었기에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국왕입니다.

 

왕위 계승자로 정해진 후에도
2차 세계 대전에 자원입대했었습니다.
보급부대의 운전을 담당했는데, 다른 군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답니다.

 

전쟁이 끝나고 윈스턴 처칠 수상 시절에 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후 영국의 회복과 재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인물의 평가에는 호불호가 있지만,
1999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등
영연방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인정한 상징적 인물입니다.

 

2.
13세에 만나서 첫눈에 반했던
필립 공과 스물세 살에 결혼했습니다.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아서
영국 황실에 오점을 남겼다는 대중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유치원 선생을 하던 다이애나와 결혼한 찰스 황태자가
다이애나 왕비와 이혼하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으면서
영국 황실의 명예가 흔들렸습니다.

 

영국의 국왕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흔들림없이 국왕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작년에 평생 동지였던 남편 필립 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졌답니다.
올 초에는 코로나에 감염되기도 했습니다.

 

서거하기 하루 전까지
영국 총리의 예방을 받으면서
임무에 충실할 만큼 성실한 인물이었습니다.

 

3.
영연방의 군주는
어느덧 73세가 된 찰스 황태자가 물려받았습니다.
멀지 않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사이에서 태어난
윌리엄 왕자(40세)가 영국 왕이 되겠지요.
그렇게 한 세대가 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저의 소년 시절, 청년시절,
장년 그리고 60대에 접어든 지금도
영국 여왕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신기할 정도여서 정말 그분이 맞는지 검색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가셨습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전도서 기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요,
모든 사람은 각자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되감기를 하거나,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오늘 하루 곰곰이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뜻깊고 세밀하게
신앙 가운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

 

하나님,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참빛 식구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1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