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 읽기를 잠시 쉬고

마가복음을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읽다가

신약의 복음서를 읽으니 더욱 은혜롭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마가복음 2장에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복음을,

새 부대는 복음을 간직한 그릇, 즉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과

새롭게 세워질 교회를 가리켰을 것입니다.

 

특별히, 금식을 놓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말씀하셨으니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금식과 그것을 장려하는 유대교를

헌 포도주와 헌 부대에 비유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차 실천하게 될 금식과

그 금식에 동참할 교회가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되겠지요.

 

2.

이번 주는 종교개혁 주일이고

10월 31일은 말틴 루터가 당시의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부르크 성당에 게시한 지5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500년 전 말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말 그대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은 사건이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신교라는 새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부대가 많이 헐었고,

포도주도 맛을 많이 잃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개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3.

사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새 날을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새 날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헌- 것이 되지 않도록

새 날을 주시고

새 복음으로 채워 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직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부대가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헌 것은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새롭게 변화되고, 개혁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새롭게 됨은 물론

새로운 세상까지 꿈꾸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예레미야 애가 3:21-23)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Lamentation 3:21-23)

 

하나님 아버지,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담기에 충분한

새롭고 신실한 새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2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말틴 루터 역시 운명적으로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20년 세 개의 논문을 연거푸 발표합니다. 첫번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을 피력합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그 이후로 뜨겁게 전개된 성만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자신을 파문시키려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말틴 루터의 사상을 잘 담고 있는 주옥같은 글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율법의 틀에 가둬두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경에 반하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주장했습니다. 말틴 루터 자신도 탑의 경험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 안에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단지 손님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낯선 의,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죄와 율법 그리고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에서 밝힌 첫 번째 명제 대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가 논문에서 밝히 두 번째 명제는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종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는 억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면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외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말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원했습니다:“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라고 그의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자칫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알려주듯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한 걸음 나가서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길 원합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고귀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2016년 10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아하 Aha

좋은 아침입니다.

 

주로 권사님들께서 정기적으로 참석하시는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에서는

에스겔서와 마가복음을 한 장씩 읽어갑니다.

 

마가복음 읽기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

수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해도 첨부한 <내용 요약>을 각자 읽으시면서

우리 교회의 성경 읽기와 성경공부에 동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에스겔서는 대부분의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Lord)이심을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이르는 제국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국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엊그제 읽은 에스겔서 25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암몬과 모압에 대한 예언을,

26-28장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커다란 교역을 하면서 풍요를 누리던

두로에 대한 예언이 등장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제국 앞에서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말을 무시한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2.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본

주변국가들은 깨소금 맛이라고 아주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가는 것을 본 암몬 사람들은

“아하(Aha) 좋다”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모압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나 별 차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두로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틈을 타서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로다”라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주일설교에서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하다고 느끼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을 보고 주변국들이 똑같이 샤덴프로이데하고 있습니다.

 

아하(Ahah

– 남을 조롱할 때 쓰는 히브리어 감탄사입니다.

 

“아하 잘됐다”

“아하 하나님 백성도 별 것 아니구나”

“아하 이스라엘이 망했으니 이제 내 세상이 되었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식의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마음이 힘들지만 그럴수록 주님을 바라보면서

씩—웃고 신앙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행여나 우리 마음속에

남의 불행을 보고 저런 마음이 들면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런 생각을 밖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에스겔서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두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모두 듣고 계셨고

결국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삶이 마음처럼 펼쳐지지 않고

때로는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샤덴프로이데의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죽으시며 세상에 생명과 화평을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함께 연대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힘냅시다!

 

내가 주 여호와인 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25:7)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Ezek 25:7)

 

하나님 아버지,

아름다운 믿음과 선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19 이-메일 목회 서신)

성령의 바람

지난 화요일 새벽,

교회에 도착하니 낙엽이 타는 듯한 냄새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기온이 떨어지면서

이웃집에서 벽난로를 때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나파 밸리의 산불 냄새였습니다.

냄새는 물론 재가 날아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

나파와 산타로사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생명을 잃거나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분들부터

집이며 재산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진 분들까지

산불의 화염이 핥고 간 자취가 너무 큽니다.

 

이번 산불은

“디아블로 윈드(diablo wind)”로 불리는

내륙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번졌습니다.

 

디아블로 윈드는

봄철과 가을에 부는 폭풍 바람으로

특히 건조한 가을에 치명적인 산불을 일으킵니다.

그 위력이 대단해서 “악마 바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시속 80마일에 육박하는 바람과 함께

불길이 쏜살같이 번지는 위력을 갖고 있으니

가히 악마라고 불릴 만합니다.

 

불에 타서 황폐하게 된 산타로사 시가지의

전과 후(before and after)의 사진을 보니

앞으로 복구하고 완전하게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2.

지난 주일 밤에는 라스베이거스의 총격 사건이 일어나더니

이번 주일에는 우리 동네에서 큰 산불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이곳저곳에서 악마의 바람이 부는 듯합니다.

 

예전에 자주 부르던

<부흥>이라는 복음 성가가 생각납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합니다.

예상치 않았던 사고와 재난으로

망연자실한 분들께 위로와 능력의 바람이 불길 원합니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이 속히 오고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7)

Restore us, O God of hosts; let your face shine, that we may be saved! (Psalms 80:7)

 

하나님 아버지,

어그러지고 부서진 세상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12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형상

1.

지난 주일 저녁,

10월의 첫째 주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하루를 마감하던 우리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1시부터 속보가 뜨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라스베이거스에 총격 사건이 있었고

현장을 연결해서 목격자들의 얘기를 듣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엄청난 일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최근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총격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범인이

멀쩡한 60대의 은퇴자라는 사실에

우리는 또 한 번 놀랐고 아연실색했습니다.

 

계속되는 보도를 보면서

총격을 가한 범인이 그동안 사들인 총기의 숫자,

도박장 출입, 동거녀의 정체,

도피할 것을 계획했으며, 공모의 가능성까지

정확한 범행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뉴스를 접할 때마다 설레설레 고개를 졌게 됩니다.

 

이번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총격까지 왔으니

이제는 정부나 정치권이 나서서 최고 우선순위를 두고

무엇보다 총기를 규제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 총기협회의 로비가 강하다고 해도

무고한 희생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길 바라고

희생자 유가족들과 부상 중인 분들의 위로와 회복을 기도합니다.

 

2.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지위고하, 남녀노소, 인종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무차별 총격은 물론

생명을 담보로 하는 범죄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향한 폭행과 폭언 등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60명에 가까운 분들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몸과 마음도 무척 아프실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분이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았어도 그렇게 했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분노한 시민의 말대로 그분은 죽어서 정말 나쁜 곳에 가야 할 것입니다.

 

3.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험한 일이 자꾸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의 양심에, 생각과 삶 속에 되살아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원합니다.

이웃을 하나님처럼 대우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Gen 1: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옵소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5이-메일 목회 서신)

용기 2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자신의 이름을 딴 청소기(Dyson)로 유명한

영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James Dyson은

2020년까지 전기차를 세상에 내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2015년부터 400여 명의 직원들과

배터리로 작동하는 전기차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앞으로 2조 달러 이상을 투자해서

깜짝 놀랄만한 전기 자동차를 발명하겠답니다.

 

그는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에 앞서서 발명가였습니다.

쓰레기 백(bag)을 사용하는 진공청소기가 쉽게 막히고 고장 나는 것에 불편을 느끼던 중

제재소를 방문해서 나무에서 나오는 톱밥을 깨끗하게 빨아들이는

원심력 흡입기를 보고는 그 기술을 소형 청소기에 도입했습니다.

 

또한, 그는 디젤엔진에서 나오는 찌꺼기들을 완전 연소시키는 기술에 관심을 보였고

그것을 통해서 대기 오염을 막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가

특별한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것입니다.

 

혹자는 그의 진공청소기 기술이

기껏해야 헤어드라이어 정도로 확장되었는데

전기 자동차를 발명한다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하지만, 이미 앞서서 성공한 테슬라도 있고

다이슨이 갖고 있는 기술과 잠재력을 볼 때

그가 내놓을 혁신적인 전기 자동차를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현대를 비롯한 자동차의 거장들이

너도나도 전기 자동차에 뛰어들고 있는 가운데

2020년대는 자동차 산업의 혁명이 이뤄질 것 같습니다.

 

2.

세상은 용기 있는 사람들로 인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아이디어 하나 갖고 시작하는 사람들,

앞에 있는 골리앗을 향해서 질주하는 사람들,

자기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고

인류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사람들.

그런데 이들의 용기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올해 70세인 Dyson만 해도

1970년부터 원심력을 사용한 공기 흡입기를 연구했습니다.

한때는 미술 선생님이었던 아내가 가계를 책임졌고

그의 발명품을 받아주는 회사가 없어서 여기저기 구걸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갖고

발명가, 사업가의 길을 걸어서 청소기 업체의 거장이 되더니

전기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것입니다.

앞으로 Dyson의 용기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지켜보는 것만도 흥미진진합니다.

 

3.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모두 골리앗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다윗은 담대하게 골리앗을 마주했습니다.

 

그의 입에서만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전쟁에 나간 이스라엘 군대 가운데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고백입니다.

발상의 전환입니다. 골리앗을 대면하는 용기입니다.

 

다윗의 용기도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양들을 공격하는 야생동물로부터

양을 보호하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용기였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개인의 삶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믿음에서 우러나온 용기를 갖고 세상을 살기 원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삶과

지금 현재 갖고 있는 자산들이

앞길을 열어가는 데 꼭 사용되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31:24)

Be strong, and let your heart take courage,

all you who wait for the LORD! (Psalms 31:24)

 

 

하나님 아버지,

주님 주시는 용기로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이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28이-메일 목회 서신)

용기

좋은 아침입니다

 

미국 군대에서 가장 힘들다는 해병대 보병학교에서

최초로 여성 장교가 졸업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2012년, 여성 장교에게 보병학교 입학을 허용한 이래

35명의 여성이 도전했지만 13주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이번 여성 장교만이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가장 힘든 장교 훈련이랍니다.

훈련소에 입소한 첫날 10%가 포기하고,

전체의 25%가 중도 탈락하는데,

여성 최초로 훈련을 마치고 일선에서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니.

이 분의 용기가 대단합니다.

 

세상은 물론

우리 자신이 처한 곳에서

아니 각 개인의 삶에서 어떤 일을 최초로 해내는 것은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앞선 사람들이 실패했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모두 힘겨워하는 일을 끝까지 참고 성취하는 것은

그 일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대단한 업적입니다.

 

2.

지난주부터

사무엘상 17장에 있는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섰을 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버지 심부름을 온 베들레헴 목동 다윗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 섭니다.

 

그러고 보면

다윗 역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홀로 나선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해서 용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3.

살다 보면, 어떤 일을 위해서

용기가 필요한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혼자서 가는 길입니다.

아무도 성공하지 않은 길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 갈 확률이 높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길을 시작하는 믿음과 용기입니다.

 

그 힘들다는 해병대 보병 학교에 지원했던

36명의 여성이 그 길을 갔습니다.

그중에 최초로 졸업을 앞둔 여성이 있기에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장교들이 희망을 품고 도전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크고 작은 일들이 닥칩니다.

지금 하는 일이 힘들어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해내기 원합니다.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이어도 “선구자” “개척자”라는 소명을 갖고 걷기 원합니다.

 

각자의 인생길이 힘겨워도

용기를 갖고, 주님과 더불어 끝까지 걸어가기 원합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인생길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앞에서 미리 가본 사람도 없이

날마다 새롭게 써나가는 개척자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마지막까지 걸어가는 사람에게 임하는 감사와 기쁨을 누리가 원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무엘상 17:37)

And David said, “The LORD who delivered me from the paw of the lion and from the paw of the bear will deliver me from the hand of this Philistine.” (1Samuel 17:37)

 

하나님 아버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참빛 식구들께

지혜와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21이-메일 목회 서신)

질투의 우상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성경 통독과 새벽기도회에서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의 가증스러움을 고발하고,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쓰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에스겔서 8장에는

“질투의 우상 (the ido/imagel of Jealousy)”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북쪽 문에 세워진

가나안이나 이방 신들의 형상으로 추측합니다.

 

그것을 두고 “질투의 우상/형상”이라고 부른 것은

그 우상이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2.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베이컨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네 가지 우상을 제시했습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나 특정 집단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

동굴의 우상은 동굴 속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빛으로 나와서 갖게 되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편견,

시장의 우상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의존해서 세상을 판단하고 거래하는 편견,

극장의 우상은 소신없이 극장의 배우처럼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처한 환경에 갇혀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자신은 옳다고 믿고 따르지만 결국 우상에 갇힌 셈입니다.

 

3.

에스겔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백성들이 이방 신을 섬기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섬깁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각종 곤충과 짐승의 그림을 붙여놓고 그곳에 절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생명과 진리의 길인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신을 따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떠나서

다른 신과 자신들의 생각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우상에 갇힌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입장이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동굴 속의 사고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종족의 우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때로는 자신을 숨긴 채

극장의 배우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정립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치장한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상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등을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우상들을 몰아내고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으로 서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117:2)

For great is his steadfast love toward us,

and the faithfulness of the LORD endures forever.

Praise the LORD! (Psalms 117:2)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길 가는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발길 가는 곳을 찾아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14이-메일 목회 서신)

마음에 숨은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주일설교에서 살펴본 베드로전서 말씀이

이번 주로 마무리됩니다.

 

넉 달 가까이 베드로전서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모두 살펴보지 못한 채 넘어간 본문도 많습니다.

대개 주일 예배에서 다루기보다

성경공부나 특강 등에서 다루어야 할 본문들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도 살짝 건너뛰었습니다.

그런데 3장 4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but let your adorning be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with the imperishable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n God’s sight is very precious.(1Pet 3:4)

 

베드로전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바른 믿음을 강조합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잠깐 지나갈 것으로 알고

시련을 순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승화시키길 요청합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핍박이나 고난

안에서 일어나는 염려와 갈등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내면이 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데

3장 4절에서는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또 다른 자아/존재를 가리킬 것입니다.

육신과 마음을 뛰어넘는 영적인 영역(심령 spirit)을 가리킬 것입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 심령이

온유(gentle)하고 고요(quiet)해야 합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안팎에서 파도가 닥쳐오지만

깊이 숨겨진 심령에서 온유와 고요가 활동합니다.

 

절대로 썩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값진 신앙 인격입니다.

 

2.

신앙은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순간마다

온유하고 고요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살면서

자칫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남에게 보이는 것들로 치장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베드로전서에서는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소개하면서

썩지 아니할 온유와 고요함을 누리길 요청합니다.

 

저는 이것을 위해서

하루 적어도 5분의 묵상(five minute meditation)을 제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고요한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성령 하나님의 만져주심, 위로, 능력,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수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차분하고, 침착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온유와 고요함을 누리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but let your adorning be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with the imperishable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n God’s sight is very precious.(1Pet 3:4)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삶이 요동쳐도

주님께서 주시는 고요함, 부드러움, 소망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7이-메일 목회 서신)

한 가운데

좋은 아침입니다

 

성경 통독과 수요예배,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는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애가는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Lament)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0-33장을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깨지는 돌 판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십니다.

새 언약의 선포입니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 애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가서 한 가운데인

3:19-25절에 소망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깜깜합니다.

쑥과 담즙(쓸개)과 같은 고난이 닥쳤습니다.

마음이 낙심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을 걸으면서도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돌보시고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애가 3:49-50)

My eyes will flow without ceasing, without respite,

until the LORD from heaven looks down and sees. (Lam 3:49-50)

 

2.

예레미야서와 애가서의 ‘한가운데’ 위치한

소망의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 가운데를 향해야 합니다.

주변을 맴도는 신앙은 어둠 속에서 헤매며

신앙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을 두신 것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한가운데”로 향해야 함을 배웁니다.

 

신앙의 한 가운데서

모든 참빛 식구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고 싶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애 3:25)

The LORD is good to those who wait for him, to the soul who seeks him.(Lam 3:25)

 

하나님 아버지,

고난의 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언제나 선하신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3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