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나무

성경에는 수많은 식물이 등장합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산다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나무부터 들에 피는 백합화, 가시덤불과 엉겅퀴까지 식물도감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식물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에서 평생 자리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 옮겨 심지 않으면, 심지어 바위틈이나 계단 사이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지탱하면서 꽃을 피웁니다. 조변석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과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부평초와 같은 인간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그런데 식물은 언제나 배경화면이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식물 역시 비유에 동원되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로 사용될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몬드 나무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아몬드 나무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했는데 일종의 오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거의 아몬드 나무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의 살구나무는 사과나무에 가깝고,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샤케드>는 아몬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복숭아 나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는데 우리가 미국에 살아서인지 아몬드 나무보다 훨씬 생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몬드 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케드> 입니다. <샤케드>가 주목하고 지켜본다는 동사 <샤카드>와 비슷하고 때로는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아몬드 나무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고라 일당이 땅이 갈라지면서 죽습니다. 그 사건으로 백성들이 모세에게 책임을 묻자 하나님께서 열두지파에서 각각 지팡이를 가져와서 언약궤 앞에 놓도록 하셨습니다. 이튿날 보니, 열두 지파의 지팡이 가운데서 아론의 지팡이에 아몬드꽃과 열매가 맺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자신이 세운 제사장으로 주목하고 계신다는 표시였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소에는 언제나 등불을 켜 놓았습니다. 등불을 받치는 등대 발판에 아몬드꽃 무늬를 새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예배하는 주의 백성들을 주목하고 지켜 보신다는 뜻으로 아몬드꽃 무늬를 새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몬드 나무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니 예레미야가 아몬드 가지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몬드 나무 <샤케드>와 지켜본다는 <샤카드>를 동시에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성취될 것을 강조한 본문입니다. 이처럼 아몬드 나무 <샤케드>는 이름 때문에 성경의 중요한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아몬드 나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것을 예고하면서 1-2월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랍니다. 그러니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아몬드 꽃이 피면 봄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을 안전하게 <샤카드> 지켜 주셨기에 봄을 맞을 수 있었으니 <샤케드> 아몬드 꽃은 감사와 희망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연분홍색 아몬드 꽃이 만발하면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노년의 백발에 비유했답니다. 우리 식으로 벚꽃을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몬드는 이스라엘의 특산물이어서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갈 때도 아몬드를 선물로 챙길 정도였습니다. 아몬드는 우리도 즐겨 먹는 견과류에 속합니다. 아몬드를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샤카드>지켜주시길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몬드 껍질은 고동색이지만 속은 하얗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우리의 내면이 아름답고 정결하기 원합니다.

 

우리 동네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올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지만, 이제는 베이 지역 특유의 화창한 날씨가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 동안 우리를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과 삶에도 아몬드 꽃이 활짝 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 아몬드는 소망의 꽃입니다. 새날의 시작입니다. <샤케드> 아몬드를 통해서 <샤카드> 우리를 주목하시고,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기 원합니다.(2019년 3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