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순한 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양극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가 설득력을 갖고, 흑이든 백이든 한쪽을 취할 것을 강요합니다. 중간에 있으면 회색지대라면서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시작하니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화, 협력, 상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양쪽이 혈안이 되어서 싸웁니다. 함께 뜻을 합쳐야 할 공동선(共同善)의 이슈를 갖고도 상대방을 깎아내립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태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치인들이 양극화를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소신껏 주장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상대방을 깎아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외도를 해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요! 이 말속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양극화 현상은 더욱 깊어 갑니다.

 

정치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 한국에서 방영되는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예전에는 방송에서 금지될 법한 용어나 말투가 난무합니다. 조용하고 온화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은 편집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거친 표현을 사용하는 출연자의 말이 자막과 함께 전파를 탑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이 남을 비난하거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식으로 방송 분량을 확보합니다.

 

물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구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래도 방송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거친 표현을 마다치 않는 인기인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시청자들도 이런 식의 방송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아 씁쓸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알려주는 책에서 “급소를 찌르는 말을 삼가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말은 끝까지 마음에 품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급소를 찌르는 말로 상대방을 무너뜨렸다고 통쾌하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부메랑 법칙을 기억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격언도 기억합니다. 자칫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서는 온순한 혀를 생명 나무라고 했습니다. 생명 나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인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그리고 잠언에만 등장합니다. “온순한”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마르페>는 “치료하다<라파>”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온순한 말이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살립니다. 당시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온순한 말속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성경은 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심으로 폭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 제자들이 각 민족의 말로 복음을 전하고 바벨탑 이래 갈라진 언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 말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성취, 다양한 사람까지 하나가 되게 하는 조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친 말을 사용하고,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면서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인상 찌푸리는 말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말로 내 편과 네 편을 가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양편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해도 아름답고 순화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사려 깊은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온순한 혀가 생명 나무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 사용이 세상을 밝고 맑게 만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2019년 6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