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헤어짐

처음 담임 목회를 인디애나주의 블루밍턴이라는 학원촌에서 시작했습니다. 교인 대부분이 유학생이었습니다. 한 학년이 끝나고 졸업 시즌인 5월이 되면 수십 명의 교인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동안 정들었던 교인들을 떠나 보내기가 쉽지 않아서 예배 시간마다 감정을 추슬러야 했습니다. “울보 목사”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방학 동안 남아 있는 교인들과 관심사 소그룹을 만들어서 운동, 요리, 성경통독, 유적지 탐사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면 영락없이 새로운 교인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외향적이지 못한 제 성격 탓에 새로운 교인들과 다시 정이 드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별의 아쉬움이 새로운 만남으로 치유가 되었지만 매년 반복되는 이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14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목회지를 옮기면서, 이민 교회이니 헤어짐 없이 교인들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정주목회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민 목회 역시 이런저런 일들로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교인들의 이동이 생각보다 잦았습니다. 목사인 저의 부족함이 컸지만,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다양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이별이 반복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지금까지 목회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가수가 노래했듯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운명입니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삶을 나누는 만남은 그 끝이 어떠하든지 축복이고 모든 만남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반면, 이별은 언제나 아쉽습니다. 함께 있을 때, 더 잘해 주어야 했습니다. 헤어짐 없이 함께 할 수 있기를 서로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축복하면서 헤어질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2020년대를 여는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았습니다. 올해는 쥐띠 해입니다. 쥐띠에 “아들 자(子)”를 쓰는 것은 서생원(鼠生員) 쥐님들의 빠른 번식을 강조한답니다. 새해에는 우리 삶이 번창하길 원합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이민 생할에 열매가 있고, 약하고 가난한 이웃들까지 허리 펴고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이 되길 기도합니다.

 

새해에도 만남과 헤어짐을 끊임없이 경험할 것입니다. 마음 설레는 만남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 생활에서 잠시라도 만나서 회포를 풀고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만남이 소중하기에 옷깃을 스치는 만남도 귀하게 여기고 눈인사라도 나누기 원합니다. 세상의 만남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도 지속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과 만남이 풍성하길 원합니다. 아무쪼록 헤어짐이 필연적이라면 좋은 이별이길 바랍니다.

 

2006년 6월부터 13년 6개월 동안 매월 마지막 주에 한국일보에 종교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번호를 매기면서 칼럼을 저장했더니 오늘이 161번째입니다. 첫 번째 칼럼 제목이 “인연(因緣)”이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인연이 꽤 길게 이어졌습니다. 제 글을 빼놓지 않고 읽으신다면서 격려해 주시던 분들, 13년 전 사진을 교체하지 않았더니 실물을 보면서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던 분들, 전화로 칼럼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상담을 요청하신 분들이 종종 계셨습니다. 종교 칼럼이 맺어준 인연이었기에 더욱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칼럼입니다. 그동안 썼던 글의 제목을 훑어보았더니 샌프란시스코에서 제 목회와 칼럼이 맥을 같이 했습니다. 지난 십여 년 세상의 변화도 제목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칼럼을 쓴지 십 년이 지나면서 더 훌륭하신 필진께 이 공간을 물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사진을 교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이 푹- 들어서인지 쉽게 펜을 놓지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칼럼을 보내려니 더 좋은 글로 독자들을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생기지만,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우리 인생길에서 또 하나의 헤어짐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십 년 이상 글을 쓸 기회를 주신 한국일보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0년 1월 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