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땡큐(thank you)”입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웬만한 상황만 되면 “땡큐”를 연발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의아했습니다. 마트에서 조금만 양보해도,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해도, 심지어 상대방의 호의를 점잖게 거절할 때도 앞에 노(no)를 붙여서 “땡큐”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땡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20여 년 미국에 살다 보니 제 입에서도 땡큐가 저절로 나옵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땡큐가 나와서 겸연쩍을 때도 있었습니다.

 

감사는 표현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다”인데, 이 단어는 “던지다” “고백하다”는 동사에서 발전했습니다. 감사는 던지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표출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때 감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3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여보/당신을 못합니다. 처음부터 호칭을 정리하지 않으니 저는 아내를 “아무개 엄마”로 큰 애 이름을 앞에 넣어서 부릅니다. 미국 사람들의 애정 어린 호칭이나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사랑은 물론 감사의 표현도 서툽니다. 미국에 살면서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더 연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속에 간직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배웠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진심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왠지 경망스럽게 느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즘 젊은이들의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력에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허물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젊은 세대가 솔직히 부럽습니다.

 

물론,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감사는 속이 빈 강정과 같습니다. 아이작 월튼이라는 영국 작가는 하나님께서 두 개의 처소를 갖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속에 있답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축복이 이미 다가오고 있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속담도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감사하는 마음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마음의 감사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 스쳐 지나간 인연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이 진리일 정도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손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 식구들, 꼭 필요할 때 함께 해 준 이웃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두 번의 도움을 받았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지속되던 관계가 아쉽게 끝났어도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신세진 것이 많아서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감사절을 맞습니다. 지난 주간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면 추수감사절인 오늘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하기 원합니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이름도 없이 도움을 준 손길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해피 땡스기빙! (2017년 11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CNN인터넷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떴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콜로라도 볼더가 가장 행복한 도시였고,

우리 지역인 산타크루즈와 동부 버지니아의 샤롯츠빌이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습니다.

산호세는 6위였고 샌프란시스코는 25위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댄 뷰트너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갖고 행복지수를 매긴 결과였습니다:

만족도 (pride), 즐거움(pleasure), 삶의 목적 (purpose).

 

만족도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1-10의 수치로 표시하게 했답니다.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측정한 것입니다.

 

즐거움을 측정하는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지난 24시간 동안 얼마나 자주 미소 짓고, 깔깔 웃고,

기쁜 감정을 느꼈는지 물었습니다.

 

마지막 삶의 목적은

바로 전날 흥미로운 일을 행했거나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 배운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콜로라도 볼더에 사시는 분들이

위의 세 가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셈입니다.

 

샌프란에 사시는 분들의 경우

렌트비와 생활비가 너무 비싸서

첫 번째 행복지수에서 밀렸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웃음의 숫자나 빈도도 줄어들겠지요.

삶을 향한 목적 지수는 샌프란도 높았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2시간여 떨어진

산타크루즈가 2위가 되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 가지 기준을 우리 각자에 적용해서

행복도를 생각해 보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자부심, 행복감, 그리고 삶의 분명한 목적 추구.

 

여기에 한 가지

“감사”라는 덕목이 들어가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데,

어느 정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감사야말로

우리의 삶의 행복지수를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이웃과 주변 환경에 대한 감사,

거기에 한 해를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준 자신에 대한 감사!

 

남은 한 주간 넘치는 감사로 보내시고

주일에 기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편 2절)

Let us come into his presence with thanksgiving;

let us make a joyful noise to him with songs of praise! (Psalms 95:2)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23이-메일 목회 서신)

찾아오시는 예수님: 가나 혼인잔치에서

오늘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앞에 “추수”가 들어 있는 것은 추수감사절이 농경 사회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찾는다면 가을에 지키는 장막절일 것입니다. 일년 동안 이모작이상이 가능한 팔레스타인에서 마지막 포도와 올리브 추수를 끝내고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감사절은 옛날 출애굽한 조상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텐트 생활한 것을 기억하면서 일주일 동안 장막에서 지내는 것으로 대신 했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되새기는 특별한 감사절이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620년 11월 21일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어려움을 이기고 첫해 수확한 것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을 도운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인 것에서 추수감사절이 유래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1800년대 말, 한국은 전형적인 농경사회였습니다. 여름에는 보리를 수확해서 “맥추감사”를 지켰고, 가을에는 벼를 비롯한 채소를 수확하면서 “추수감사”를 지켰습니다. 선교사들의 영향과 추수가 끝난 후에 지킨 감사절이었기에 11월 셋째 주에 지켰습니다. 이처럼 농경사회의 영향으로 영어 “감사절(Thanksgiving Day)”앞에 “추수”가 붙어서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영어 표현 그대로 일년에 한번 지키는 “감사절”로 부르는 것도 좋겠습니다.

 

감사절은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민 교회 풍습 그대로 여선 교회가 정성껏 준비한 칠면조 고기와 더불어 감사절 만찬을 갖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잔칫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 역시 혼인 잔치가 배경입니다. 갈릴리 가나라는 동네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아서 참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날씨가 선선해 지는 밤에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예수님께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행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첫번째입니다. 자칫 멀쑥할 수 있었던 잔치 자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고 계신 곳에 은혜가 임하고 기쁨의 축제가 계속됩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니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갖는 감사절 만찬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은혜가 임하길 바랍니다.-河-

더불어 살기

좋은 아침입니다.

 

며칠 전, 한국과 미국에서는

짧은 영상 하나가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아시안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회의를 마치면서 참석한 정상들이

서로 교차해서 팔짱을 끼고

우정과 하나 됨을 보여주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교차에서 손을 잡는 대열입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은 맨 끝에 위치해서

한 손은 한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에 섰습니다.

아시안 정상들이 많아서인지 체격이 눈에 띠게 컸습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서로 교차해서 손을 잡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당황했다기보다는

평생 그런 의식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정상이 트럼프의 손을 먼저 가져갔더니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손을 가져오려고,

아니면 자기 손만 잡으려는 듯 왼손을 갖다 댑니다.

자연히 왼쪽에 서 있던 분은 한 손이 놀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중에는 팔짱을 꼈지만

난생처음 왼편과 오른편 사람의 손을 잡은 듯이

어색하고 심지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어쩌면 이 분은 독불장군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손에 손을 잡아 본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악수할 때도 상대방을 확- 끌어당기는 습관이 있어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데

역시 자기 위주의 행동 방식입니다.

 

2.

홀로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홀로서기 못지않게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손을 엇갈려 잡으면서 하나가 되고

마음과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신앙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나 혼자만의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절반의 성공입니다.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서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가정, 교회, 그리고 일터와 만남이

우리 신앙의 훈련소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리같이 조그만 교회는

공동체의 삶을 훈련하는데 안성맞춤입니다.

 

3.

손에 손을 잡는 방식과 행동이

어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대통령이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이니

우리가 사는 미국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올해도 감사절을 맞습니다.

함께 하는 가족, 교우들, 이웃들, 잠시 잠깐의 돕는 손길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불어 살아간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고 감사입니다.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alms 133:1)

 

하나님 아버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

주안의 형제 자매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16이-메일 목회 서신)

                   

찾아오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

어느덧 올해도 두 달 남짓 남았습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12월 첫 주에 대강절(Advent)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니 11월이 교회력의 마지막인 셈입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시작으로 성탄절과 주현절, 사순절과 부활절을 거쳐서 거의 반년을 성령강림 주간으로 지냅니다. 강단 색깔이 초록이듯이 성령의 임재와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가는 기간입니다. 성령강림 주간을 마무리하고 대강절을 기대하면서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고, 한 해를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성령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앞에 있는 골리앗은 무너져야 함을 배웠습니다. 일상에 강했던 다윗이 자신이 양을 칠 때 만났던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말씀은 통쾌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일상의 경험을 현재는 물론 믿음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미래에 적용하길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다윗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할 때 어려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다윗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윗과 비교되는 우리의  부족함에 의기소침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올해 남은 두 달 동안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다윗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양을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키고, 한 마리의 양이라도 끝까지 쫓아가서 구해내는 다윗의 모습은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골리앗 앞에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모습 속에서 오늘 본문에 있듯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목자되신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모든 양의 이름을 알고 끝까지 양을 지킵니다. 양도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반면에 돈만 받고 양을 치는 것에 소홀한 삯꾼 목자는 양이 어떻게 되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윗을 따라갈 수 없지만,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그 이름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목숨을 바치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河-

경계선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에스겔서는

마지막 40-48장에서 성전의 회복을 약속합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의 모습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건축물입니다.

여러 개의 방과 구조물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질서와 균형의 절정입니다.

 

에스겔 성전은 실제로 건축되지 않았고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성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이 서로 어우러지고

자세히 읽을수록 예사롭지 않은 하나님의 경륜(plan)을 발견합니다.

 

오늘 새벽에는 에스겔서 42장을 읽었는데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공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은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구약의 거룩함은 정함(clean)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충분히 정결해야 합니다.

부정한 것들(unclean)이 들어오지 못해야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방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담(wall)”을 쌓아서 영역을 구분했습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성스러운 것(Sacred)과 속된 것(secular)을 구분하는 담입니다.

 

2.

우리에게도 거룩함을 유지시켜주는 영역이 필요합니다.

부정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서 교회로 숨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세상에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구별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경계선을 긋는 것입니다.

 

에스겔에 이어서 읽게 될 다니엘서를 통해서

우리가 정해야 할 경계를 발견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도 바뀌고, 바벨론 학문과 언어를 배우면서

그가 살아야 할 제국 바벨론에 녹아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먹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부정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먹거리가 다니엘이 쌓은 “담/경계”였습니다.

 

3.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경계선을 긋고

거룩한 영역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거룩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 가운데 몇 가지에 “뜻을 정해서”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지혜로울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담/경계”를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세상을 구별하는 경계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유지시켜주는 영역입니다.

 

잠시 멈춰서

각자가 세워놓은 경계를 점검해 봅시다.

 

세상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근사한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방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 42:20)

It had a wall around it, 500 cubits long and 500 cubits broad,

to make a separation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Ezek 42:20)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세상에 맛과 신선함을 주는 소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9이-메일 목회 서신)

다윗: 승리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두 달 전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교리(머리)-체험(가슴)-실천(손과 발)>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공부하고 나름대로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교리). 머리에 머무는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올 때 (체험), 신앙에 역동성이 생기고 손과 발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면서 신앙의 지경을 넓혀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인 개인적인 차원과 이웃과 세상에 대한 공적인 차원으로 나눴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서 신앙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개인을 넘어서 세상까지 신앙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개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것이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체험이 교리와 실천에 힘을 주듯이, 공동체가 개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주고 신앙의 지경을 세상으로 확장시킵니다. 참빛 공동체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이번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연속 설교는 개인과 체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 각자가 마주하는 골리앗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안팎에 수없이 많은 골리앗이 있습니다. 골리앗을 만나면 우선 두렵고, 주춤거리게 되고, 골리앗의 공격이 지연되면 방심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부의 갈등이 겹쳐서 자중지란이 생기면 큰일입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다윗이 전쟁터에 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던 방식 그대로 막대기를 들고 목동의 옷을 입고 골리앗을 상대했습니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 골리앗으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에만 맴도는 생각도 아니었고, 다윗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형성된 신앙이었습니다. 물맷돌 다섯 개를 준비한 다윗은 첫 번째 물맷돌로 골리앗을 무너뜨립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체험을 통한 믿음이 이룬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 다윗 개인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승리는 곧 이스라엘을 구하는 공적인 승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골리앗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 어떤 골리앗도 무너뜨리고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골리앗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