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8): 돌보시는 하나님 2
Author: 참빛
돌보시는 하나님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편지를 권면과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많은 것을 잃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명과 진리의 길임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것이 가치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는 서신 마지막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믿음과 태도에 대해서 요약해 주었습니다.
우선,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힘들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내어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의 한 가지 예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를 맡기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염려를 하나님께 던지고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허리를 동이고, 고난이 닥쳐도 그것에 맞설 수 있는 갑옷을 입고,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안이하게 서 있으면 시험에 들고 신앙이 무너져 내립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신앙 가운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믿음을 영적 싸움에서 방패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시험을 이기고 마귀를 막아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넷째로,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혼자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함께 당하고 있다는 동지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래될 것 같아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잠깐이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고난의 끝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담대하게 고난을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참되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영역이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마음에 숨은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주일설교에서 살펴본 베드로전서 말씀이
이번 주로 마무리됩니다.
넉 달 가까이 베드로전서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모두 살펴보지 못한 채 넘어간 본문도 많습니다.
대개 주일 예배에서 다루기보다
성경공부나 특강 등에서 다루어야 할 본문들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도 살짝 건너뛰었습니다.
그런데 3장 4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but let your adorning be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with the imperishable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n God’s sight is very precious.(1Pet 3:4)
베드로전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바른 믿음을 강조합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잠깐 지나갈 것으로 알고
시련을 순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승화시키길 요청합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핍박이나 고난
안에서 일어나는 염려와 갈등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내면이 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데
3장 4절에서는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또 다른 자아/존재를 가리킬 것입니다.
육신과 마음을 뛰어넘는 영적인 영역(심령 spirit)을 가리킬 것입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 심령이
온유(gentle)하고 고요(quiet)해야 합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안팎에서 파도가 닥쳐오지만
깊이 숨겨진 심령에서 온유와 고요가 활동합니다.
절대로 썩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값진 신앙 인격입니다.
2.
신앙은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순간마다
온유하고 고요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살면서
자칫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남에게 보이는 것들로 치장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베드로전서에서는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소개하면서
썩지 아니할 온유와 고요함을 누리길 요청합니다.
저는 이것을 위해서
하루 적어도 5분의 묵상(five minute meditation)을 제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고요한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성령 하나님의 만져주심, 위로, 능력,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수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차분하고, 침착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온유와 고요함을 누리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but let your adorning be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with the imperishable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n God’s sight is very precious.(1Pet 3:4)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삶이 요동쳐도
주님께서 주시는 고요함, 부드러움, 소망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7이-메일 목회 서신)
2017년 9월 1주 말씀
베드로전서 (17): 돌보시는 하나님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장까지 왔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육체적인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기는 이전 것들과의 단절도 여기에 속합니다. 옛날 습관과 결별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로부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는 자신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여정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부활과 생명의 인생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때 꼭 필요한 것이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지들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공동체를 세워가라는 말씀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공동체를 이루는 대표적인 두 세대가 나옵니다. 우선, 장로 입니다. 장로는 “원로”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보면, 교회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고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부릅니다. 공동체를 이끄는 중에 받은 고난이 헛되지 않고 장차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지도자이지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주의 일에 참여하고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장로에 이어서 젊은이들에게 교훈합니다. 여기서 젊은이는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 힘있게 활동하는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장로들에게 순종할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것을 경험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세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겸손하게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같은 생각을 품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것을 부탁합니다. “모든 염려”는 예수님을 믿는 여정 가운데 생기는 불안과 근심입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당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각 개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나그네 된 하나님 백성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河-
샐러드 보울
지난 8월 12일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의 후폭풍이 미국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반대편 시위자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나치 사상에 물든 한 청년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서 20대의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물론 곳곳에 남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동상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대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남부 연합의 사상이 깃들어 있거나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하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공장소가 아닌 박물관 또는 특정 장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로 발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 등 백인 편향으로 보이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냅니다.
중서부를 비롯한 백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에게 “미국을 떠나라(get out of America)”는 구호와 함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강하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는 LA에서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백인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예정되었던 샌프란시스코의 극우단체 “패트리엇 프레이어”의 집회가 논란 끝에 취소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폭력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뒤숭숭합니다. 이미 4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학창시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께서는 미국을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라는 그릇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소개된 개념이니 백인 중심의 유럽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멜팅 팟”보다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녹아내려서 하나가 된 미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물이 같은 접시에 들어있는 샐러드처럼, 각각의 문화, 인종, 관습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미국이라는 그릇 속에 어우러진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만화경을 뜻하는 영어 표현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도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아름답다(beautiful)”에 “모양(form)”을 합친 말입니다. 다른 배경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샐러드 보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워야 할 미국이 많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KKK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물론 나치의 깃발을 들고 폭력을 일삼는 네오 나치 단체까지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혐오 범죄”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고, 폭언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총격을 가하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염소와 어린아이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 경계하고 안타까워할 일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일삼고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마음으로라도 동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인들처럼 보이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미국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화합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됨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멜팅 팟처럼 하나로 녹아질 수는 없지만, 샐러드 보울처럼 각자 제 맛을 내면서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각각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7년 8월 3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한 가운데
좋은 아침입니다
성경 통독과 수요예배,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는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애가는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Lament)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0-33장을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깨지는 돌 판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십니다.
새 언약의 선포입니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 애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가서 한 가운데인
3:19-25절에 소망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깜깜합니다.
쑥과 담즙(쓸개)과 같은 고난이 닥쳤습니다.
마음이 낙심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을 걸으면서도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돌보시고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애가 3:49-50)
My eyes will flow without ceasing, without respite,
until the LORD from heaven looks down and sees. (Lam 3:49-50)
2.
예레미야서와 애가서의 ‘한가운데’ 위치한
소망의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 가운데를 향해야 합니다.
주변을 맴도는 신앙은 어둠 속에서 헤매며
신앙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을 두신 것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한가운데”로 향해야 함을 배웁니다.
신앙의 한 가운데서
모든 참빛 식구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고 싶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애 3:25)
The LORD is good to those who wait for him, to the soul who seeks him.(Lam 3:25)
하나님 아버지,
고난의 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언제나 선하신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31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사랑 나눔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연초에 표어를 정하면서 우리 교회에 사랑이 넘치길 원했습니다. 세대가 어울려 있고, 발걸음이 잦은 교회이니 늘 크고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교회 사역도 인생사와 비슷해서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베드로전서에서 배운 대로 우리 모두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서 교회를 세워 나가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나그네의 삶은 외롭고 때로는 고달프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함께 걷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됩니다. 같은 처지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인생길을 걷는 신앙의 동지들보다 더 귀한 분들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신앙의 동지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올해 표어를 “서로 사랑하라”로 정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켠이 아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랑나눔>을 제안했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별로 20불 안에서 무명으로 헌금하고, 그것을 역시 무명으로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하기로 한 것입니다. 참빛 성도님들께서 제안해 주시는 곳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리치몬드에 있는 초등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이 워싱턴 DC를 다녀오는데 필요한 경비를 슬쩍 지원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두 번째 작은 사랑 나눔을 위한 헌금을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우리 성도님께서 추천하신 과테말라의 께찰떼낭고에서 사역하시는 강순진 선교사님과 사랑을 나눕니다. 해발 2,400m 고지대에 위치한 화산 지역이라고 합니다. 고지대이지만 과테말라 농산물의 절반을 생산할 정도로 비옥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모여들고 있답니다. 강선교사님(72세) 께서는 2006년부터 과테말라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교회는 물론 장애와 극빈 가정을 도우시고, 거리에서 무료급식, 의료와 교육 등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신실하게 사역하시는 분이십니다. 저희 작은 마음이 선교사님께 힘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 번 정도 작은 사랑 나눔을 더 실천할 계획입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면 안내 데스크에 있는 제안함을 통해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작은 사랑 나눔입니다. 한 주간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사랑 나눔에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2017년 8월 4주 말씀과 찬양
베드로전서 (16): 그리스도인의 고난
쏟아지는 물처럼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기도회에서는
예레미야서를 끝내고 오늘부터 예레미야 애가에 들어섰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바벨론에 의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른 조가(lament)입니다.
하나님의 성읍 예루살렘과
하나님께서 계시던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던 예루살렘이 몹쓸 도시로 변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낮에는 예루살렘을 돌아보고
밤에는 낮에 본 참상에 눈물로 주님 앞에 엎드려서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를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애타게 외쳤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예루살렘 왕들과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자신의 예언이 맞았으니 더욱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땅의 백성들,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참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애가를 지은 것입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애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자고 초대합니다.
깜깜한 어둠입니다.
쓰고 쓴 담즙을 씹는 것과 같은 세상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으니 더욱 절망적입니다.
그 순간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합니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애가 2:19)
Pour out your heart like water before the presence of the Lord!(Lam 2:19)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잘못한 것들도 쏟아내고
어려운 상황도 그대로 쏟아내고
자신 안에 들어있는 찌꺼기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 또는 교만,
여전히 남아 있는 특권의식과 자존심도 물처럼 쏟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예레미야의 초청입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내야 합니다.
선별할 필요없이 물처럼 쏟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새로운 은혜로 가득 채우고
새 날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 붓고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애가 3:22-23)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Lamentation 3;22-23)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게 하시고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의 성실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24이-메일 목회 서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