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책의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쉽게 읽히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용이 어렵고 시대 상황과 동떨어졌습니다.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글이나 영상들이 넘쳐나니

성경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하나님께서 현대에 맞는 성경을 다시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즘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을 비롯한 예언서입니다.

거칠고 어렵습니다.

비슷한 심판 예언이 반복되고,

공개적으로 읽기 난감한 대목도 있습니다.

 

그래도 40대 이상은 성경에 친숙합니다.

성경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30대 이하로 내려가면 성경은

이상한 책일 수 있습니다.

번역은 어렵고, 문장은 낯설며,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듭니다.

흥미를 잃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해석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저는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 훈련을 받아왔고

(역사비평, historical criticism)

여전히 역사적 읽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상력을 동원한 본문 해석,

독자를 고려한 성경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더 깊은 실력과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과업입니다.

 

하지만 요즘 각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춘 마니아(mania)들을 보면서,

성경을 사랑하는 마니아들도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가슴에 품고 씨름하는 성경 덕후들이지요.

성경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하며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2.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homo unis libro, a man of one book)”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한 책”은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성경만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책을 사랑하는 진정한 독서가였습니다.

원시 의학에 대한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세상에 일만 가지 책이 있어도

성경이 그 가운데 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같은 성령이 역사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웨슬리가 활동하던 19세기도 오늘날에 못지않게

이성과 과학은 물론 산업혁명까지

성경보다는 세상 학문과 기술문명이 인기를 끌 때였습니다.

 

그러니, 웨슬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

성경의 진수(眞髓)를 맛보았고 경험한 것입니다.

 

혹자가 “요즘 세상에 누가 성경을 읽겠습니까?

그냥 갖고 있는 책이지…”라고 말한다면,

“아니요, 우리는 여전히 성경을 사랑하고 읽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이 아무리 어렵고 읽기가 곤란해도

그냥 한 책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8)

 

 

하나님,

주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8. 이-메일 목회 서신)

진실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 쫓는 것)와

진실을 버린 모습을 질타합니다.

 

에스겔서뿐만 아니라

구약 예언서에서 알려주는 네 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진실(에메트), 정의(미쉬파트), 공의(차디카), 인애(헤세드)입니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솔직함입니다. 정직함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고, 꾸미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한 모습으로

심지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웃과 다른 사람 앞에서

숨김없이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진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진실은

그 다음 세 가지 덕목의 기초가 됩니다.

정의는 거짓 재판을 없애고, 공평하게 판정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편에 서면 진실과 정의는 실천됩니다.

공의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똑바로 정돈된 상태입니다.

하늘 향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함이 곧 공의입니다.

진실이 빠진 인애(사랑)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곧 참사랑입니다.

 

2.

요즘 세상은 진실이 많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짜가 판을 칩니다. 거짓말이 진실을 덮고 있습니다.

유튜브 쇼트가 자꾸 올라오는데,

진짜 같은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자연재해도 가짜로 만들어서 올리는데

진짜 같아서 깜빡 속을 때도 있습니다.

 

가짜 정보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짜일수록 화려하고 그럴듯하기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심지어 마음과 생각을 속입니다.

 

AI가 발달하면서,

진짜 같은 가짜가 더욱 많아질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매의 눈을 갖고 살피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진실하길 원합니다.

참됨이 거짓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 없기를 바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흠과 티가 많아서 주름이 깊어도

솔직하길 원합니다.

 

생명과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3:3-4)

 

하나님,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1. 이-메일 목회 서신)

완벽함 넘어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1일 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완벽주의의 고통(The Pain of Perfectionism)”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완벽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의기소침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소화불량이나 통증처럼 몸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심리학자 프렛(Frett)과 휴잇(Hewitt)은

완벽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자기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

2) 타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

3) 사회가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한다고 느끼는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는

완벽을 위해서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자기 안에 작은 단점이라도 발견되거나,

무심코 실수해도 자신을 탓하고 심한 우울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한시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잔혹하고 지루한 독백자”라고 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완벽주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삽니다.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는 더 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불완전함이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벌을 주거나 화를 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완벽을 요구하면,

결혼생활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마음에 맞추려고 하니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는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쉬운 요즘 세상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삶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2.

평생 완벽주의를 연구한 프렛과 휴잇은

완벽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가치(mattering)”에 집중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의 가치는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귀한 겁니다. 내가 자랑스러운 겁니다.

 

완벽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단순히 기준을 낮추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준만 낮췄을 뿐 여전히 완벽주의에 얽매일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결함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기사를 읽으면서,

요즘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습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42세에 생을 마감한 예도 있었거든요.

 

존재의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더욱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벽주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완벽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갑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Mat 11:28)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14. 이-메일 목회 서신)

낯설게 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8월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이 많았습니다.

한 달, 한 주간, 어떤 때는 하루의 삶이

우여곡절일 때도 있었습니다.

다이내믹한 우리의 삶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밋밋한 인생길의 반복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침 기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녁에 침대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다이내믹한 인생길이거나

반복되는 일상이거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반복되고 예사로운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의미 있고 창의적인 “카이로스”를 삽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도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를 살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억지로 새로운 일을 꾸며서 해보지만,

그것도 금세 식상하고 맙니다.

 

2.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문학 용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작가는 지루한 일상의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문학 기법을 익혀야 하고,

독자들 역시 문학 작품 속에 깃든 낯선 요소들을 찾아내서

문학 작품을 만끽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문학 용어인 ‘낯설게 하기’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삶의 ‘설렘’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새롭고 특별하고 낯설게 대하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을 “그냥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특별한 의미를 찾고,

때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진부한 것(cliché)이 아니라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으로 받고 읽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특별하지 않은 익숙한 사람이라는

밋밋한 의미로 쓰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만나는 가족을(친한 이웃들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면

호기심도 생기고, 기대도 커지고

무엇보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출 것입니다.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새롭게, 낯설게 만들면서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애가 3:23)

 

 

하나님,

다시 오지 않을 새날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변화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월스트리트저널(The Wal Street Journal)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사용하는 교과서 가운데 열 개를 특정해서

30년 전과 거의 동일하다는 보도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콧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등입니다.

 

저자나 제목을 보면

30년 동안 교과서 목록에 들기에 손색이 없는

말 그대로 고전들입니다.

 

그런데 보도에 의하면,

시대가 바뀌었고 좋은 작품도 많이 있지만,

교과서를 바꾸는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답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신문 기사에서는 몇 가지 문제도 제기했습니다.

미국 공립 학교에서 백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44%로 떨어졌는데,

상위 10권의 교과서에 속한 저자들이 모두 백인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의 독서 참여율이 뚝-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13세 이상 학생들의 일일 독서 참여율은 13%에 불과합니다.

2012년의 27%, 1984년의 35%에 비해서 현저히 줄었습니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을 읽는 학생들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학생들이 30년 전에 교과서에 편입된 고전을

재미있게 읽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학생들의 독서를 위해서

유연한 도서 목록의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2.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야 할 것은 멈춰 있는 아이러니도 발생합니다.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바른 것인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 대로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옛것을 소중히 보관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헷갈릴 때도 많습니다.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한 가지만 옳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고

옛것은 모두 틀렸다고 내다 버릴 것도 아닙니다.

이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과 지혜로운 분별이 요청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름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것저것을 번갈아 채택하다 보면

자칫 누더기로 변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바로 전에 배운 ‘십자가의 신앙(얼 spirit)’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하늘까지 높이 오르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향해서 양팔을 무한정 뻗어서

많은 사람을 품기 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릴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잣대를 사용하면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현명하고 꿋꿋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시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119:66)

 

 

하나님,

것을 고집하다가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지나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1. 이-메일 목회 서신)

 

선지자 에스겔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의 순서에 따라서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만 따를 뿐, 제가 묵상한 글을 보내고,

참빛 식구들도 본문을 읽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시길

제안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삶>에 실린 본문 해설이

마치 해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우리만의 성경 읽기입니다.

 

<생명의 삶>을 통한 성경 읽기의 유익은

아침마다 조금씩 읽다 보면

8-9년 마다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못했던 2018년부터

<생명의 삶>을 읽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3년 후면 우리 모두 성경을 통독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가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이뤄질 날이 멀지 않았네요!

 

2.

이번 달에 읽기 시작한 본문이

구약성경 에스겔서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읽기가 어렵습니다.

주로 심판 메시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범한 비슷비슷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우리와 매우 다른 시대적인 간격도 있고,

아무래도 심판 메시지를 읽는 것이 불편합니다.

에스겔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스겔 (“하나님이 강하게 하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주전 597년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겔이

바빌론 그발 강가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보면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 준비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좌우로 누워서 420일을 지냈고,

심판의 말씀이 가득 쓰인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지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에스겔의 몸속에 임하고,

에스겔이 선지자로 완전히 거듭 태어났습니다.

 

3.

에스겔의 예언을 듣게 될 청중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가증하고 완악했습니다. 성전에서도 우상을 섬길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길 부탁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열심입니다.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확률은 “제로(0)”에 가까웠지만,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신앙이나 삶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길을 가야 함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3:27)

 

 

하나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24. 이-메일 목회 서신)

아레테

좋은 아침입니다.

 

1.

“덕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떤 분야에

깊은 열정을 쏟는 사람을 일컬을 때

종종 이 단어를 사용한답니다.

 

원래는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을 지칭하는 ‘오타쿠’에서 유래했지만,

이제는 단순히 ‘광적인 팬’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한 가지 대상에 진심을 다하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예수님의 덕후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쳤으니,

십자가 덕후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2.

헬라어 “아레테”는

‘탁월함’ ‘최고의 상태’ 등을 뜻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덕(德)”으로 번역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 재능이나 실력을 최고로 발휘한 상태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최고로 발휘해서

신기록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덕(정의, 지혜, 용기, 절제)을

추구하고, 갖춘 모습입니다.

 

이처럼 헬라어 “아레테”는

최고, 극치, 최선, 정상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

저는 예수님의 아레테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아레테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아레테는

더 낮은 곳, 더 아픈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아레테, 영원한 아레테를 이루셨습니다.

 

4.

우리의 아레테는 무엇일까요?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남과 비교는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착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최고로 발휘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 철학이 강조했던

“정의, 지혜, 용기, 절제”를 추구합니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덕”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아레테, 탁월함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친절), 충성 온유와 절제(갈 5:2-23)를

우리의 삶과 성품 속에서 맺어갑니다.

기독교인의 아레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탁월함의 자리,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진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아레테]누리게 주신 분이십니다. (벧후 1:3, 새번역)

 

 

하나님,

하나님 주시는 능력으로

아주 근사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17. 이-메일 목회 서신)

자기 십자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십자가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친 후,

잠시 숨을 고르며 찬송가를 해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에 깃든 이야기였습니다.

 

설교 말미에, 제가 좋아하는 예화를 소개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메고 산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황금 십자가, 꽃으로 장식된 십자가 등

여러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원하면 십자가를 바꿔서 지고 갈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

처음엔 황금 십자가를 들어보았지만, 너무 무거웠고,

다음엔 장미꽃으로 된 십자가를 선택했지만,

조금 가다 보니 가시에  찔려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메고 온

십자가를 다시 지고 산을 내려가면서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했다는 예화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예화가 좋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그리고 앞으로 주어질 인생길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이 예화가 오늘날에도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실에 안주하라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거운 건 가볍게, 불편한 건 편하게 바꿔서

최고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고 있습니다.

문제를 감내하기보다는 해결할 때 경쟁력을 갖춥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 예화는 수동적이고

현실 순응적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네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속담을

해학적으로 바꾼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아는 길은 그냥 곧장 가라”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는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

“시작이 반이다”는 “시작은 시작일 뿐, 이미 늦었다” 등입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시대에 맞는

지혜와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을 배우고 장착하면서,

변화에 대처하고 더 나은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화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화에서 주목한 것은

여러 가지 십자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지점입니다.

결국에는 처음에 메고 온 십자가에 마음을 확정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산을 내려갑니다.

 

우리는 종종

남과 비교하며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십자가를 지고 있을까?’

‘왜 내 인생은 이리 무거울까?’

 

처음 마음을 꼭 간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남과 비교하다가, 마음이 흔들리면 지는 겁니다.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킬 만한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하나님,

십자가 붙들고

흔들림없이 주어진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10. 이-메일 목회 서신)

기적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죽음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자연법칙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말 그대로 기적(miracle)입니다.

 

저는 2천 년 전의 부활을 증명하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살아냄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효력이 있음을 드러내자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2.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이라는 영국 작가는

동화 속의 상상력을 갖고 기적을 설명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동화처럼  자유자재로

세상을 만들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기꺼이 기적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체스터튼은 기적을 ‘더 큰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을 비롯한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는

더 큰 세계라는 뜻입니다.

 

기적을 인정할 때,

사고나 상상력이 하나님의 세계로 이어지고 확장되지만,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성의 영역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튼에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1898-1963)는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1. S. 루이스에게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의 문을 열고

잠깐 방문하시면서 생긴 특별한 사건(special divine event)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믿고 인정할 때,

세상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3.

현대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진부한 말(cliché)이거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동화와 같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을 뛰어넘는 일들이 매번 발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모두 겪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말도 듣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비한 것만 쫓는 왜곡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올해 하반기가 되길 바랍니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시편72:18)

 

하나님,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신비를 보는 새달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 이-메일 목회 서신)

우주의 신비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월요일에는

매우 흥미로운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8억1천만 달러를 들여 건설한

칠레의 베라 루빈 천문대를 소개하는 자리였습니다.

.

과학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앞에서 발표하는 과학자들의 얼굴은 상기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라 루빈 천문대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새로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베라 루빈”이라는 명칭은

암흑물질(black matters, 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의 존재를 발견한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의 이름에서 왔답니다.

 

베라 루빈 천문대는 지름이 1.65 미터인 카메라 렌즈 3 개를 통해서 관측합니다.

32억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애플 핸드폰 카메라는 4,800만 화소).

베라 루빈 천문대가 찍은 사진을 한 번에 보려면,

농구장 크기의 초고해상도 TV 400대를 연결해야 한답니다.

 

앞으로 베라 루빈 천문대에서는

매일 같이 100장 이상의 고화질 우주 사진을 찍어서 정보를 축적하고

자격을 얻는 회원(국)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랍니다.

 

2.

이번에 천문대가 공개한 4개의 우주 사진은

정말 그림 같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천문대에서 공개한 사진을 보면서

‘생뚱맞게’ 창조주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창조주가 없이 우연히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가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텐트처럼 펼치시고

손가락으로 달을 붙이시고 별들을 붙이셨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동화처럼 묘사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만드신 그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자신을 생각하고 돌보시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신비로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3.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찮은 점일 뿐입니다.

 

샌프란에 사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폼을 잡으면서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을 잠깐 옆에 두고,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돌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문대가 공개한 사진만큼이나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믿음의 세계도 신비롭습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되듯이,

우리 믿음의 상상력도 실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잠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면서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면 어떨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2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