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함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의 마음을 두 글자로 요약하라면,

“긍휼(compassion)”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자기 백성을 긍휼이 여기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춥고 배고픈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긍휼의 절정입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함이

우리를 살렸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 긍휼을

“애틋함”이라고 달리 표현하고 싶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애틋함을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1)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

2)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여기서 “섭섭하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대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애틋함”은

이웃의 어려움이나 사정에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든지 함께 하며 도움이 되려는 태도입니다.

 

3.

팬데믹을 지내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졌습니다.

개인은 물론 국가도 이기적으로 변하고

파당을 짓고 자기편만 챙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물론

우선 내가 잘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일을 겪는 이웃과 감정 이입을 하고

같은 심정으로 기도해 주고

아픔을 서로 나누려는 애틋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대해주지만,

실제로 동지의식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진실한 공감이 그립습니다.

 

4.

애틋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기쁨에 함께 기뻐하기 원합니다.

감정이입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느낄 정도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서로 대하고, 기도해 주고, 얘기합시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정(情)을,

하나님의 사랑을 힘껏 나눠봅시다.

 

참빛 가족!!!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2 이-메일 목회 서신)

선구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림픽에서는

남자 마라톤이 맨 나중에 열립니다.

그런데,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여자 마라톤을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지금부터 235년 전인 1789년,

자식들을 굶겨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에

7천여 명의 어머니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면서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던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서 행진했습니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여성의 행진”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마지막에 배치되었고

마라톤 코스도 파리 시내에서 베르사유 궁전까지였습니다.

 

2.

파리 올림픽 여자 마라톤의 시작을 알린

캐서린 스위처(Kathrine Virginia Switzer)라는 인물도 특별했습니다.

캐서린 스위처는 여성 최초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마라톤을 하면 여성성이 망가지고

긴 거리를 뛸 힘과 건강이 없기에

800미터 정도가 최대 거리라고 믿었습니다.

 

1966년 바비 깁스라는 스물네 살의 마라토너가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서 길옆에 몰래 숨어 있다가

중간에 합류해서 완주했지만,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깁스를 본 캐서린 스위처라는 대학생이

이듬해인 1967년, 정식으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합니다.

 

여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K V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제출해서

261번이라는 번호를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남자처럼 후드티를 입고 뛰던 스위처가

몇 마일 지나자, 후드티를 벗어버립니다.

여자인 것을 알아낸 대회 본부장이 따라와서

스위처를 길에서 밀쳐내는 등 행패를 부립니다.

이것이 카메라 기자의 셔터에 잡혔고,

세상을 변화시킨 100장의 사진 중 하나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하고

50년이 지난 2017년,

70세의 스위처가 261번을 달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완주합니다.

이처럼 캐서린 스위처는 여자 마라톤의 길을 만든

선구자로 마라톤은 물론 여성 운동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77세가 된 캐서린 스위처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흰색 바지, 꽃무늬 셔츠, 화려한 운동화를 신고

맨 앞에 서서 여자 마라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또 하나의 여성 행진을 뜻했습니다.

 

4.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구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본

루터, 요한 웨슬리도 그 가운데 속합니다.

 

유리 천장을 뚫어내고

없던 길을 만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용기 있는 선구자들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역사를 바꿀 선구자들이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모든 선구자들을 응원합니다.

새 날을 맞으시는 참빛 식구들도 응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있느니라 (빌4:13)

 

하나님,

앞서가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5 이-메일 목회 서신)

지극히 작은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에는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공부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무조건 돌보십니다.

약자의 편에 서십니다.

약자를 보시면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발동합니다.

 

2.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관한 비유입니다.

전반부 달란트 비유는

맡겨 주신 달란트를 갖고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 받을 칭찬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했기에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받습니다.

 

후반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오른편(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도와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왼편(염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돕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마 25:40)”

 

3.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우리가 예수님이고

어려운 이웃은 우리가 도울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 속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4.

주일 말씀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점에서 고민이 생깁니다.

 

과연 우리의 도움이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돕는다고 해서 이들이 변화되거나 세상이 좋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섞인 고민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돕는 심정으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전제입니다. 달리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입해서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지속적이지 않고 한번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는 꼭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5.

거리의 노숙자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절대적 약자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가 도와야 할 예수님입니다.

 

힘껏 도웁시다.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마태 25:40)

 

 

하나님,

도움을 주는 인생,

돕는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8 이-메일 목회 서신)

넉넉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음향 시스템은

훌륭한 편이 아닙니다.

 

용량이 크다면,

중간 정도의 볼륨을 조절해 놓아도 될 듯합니다.

마이크에서 조금 떨어져도

목소리가 편안하게 전달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앰프의 용량이 작으니

마이크 볼륨을 높이면 “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니 방송실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조절하느라 늘 긴장합니다.

 

2.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사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오클랜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의 사연이 소개되는데

훔친 트럭으로 사업장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현금 입출 기계(ATM)를 떼어서 그 안에 있는 돈을 가져갑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경찰에 연락해도 오지 않거나

와서는 대충 둘러보고 떠납니다.

웬만한 범죄는 하루 이틀 만에 다시 석방되니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도 뻑뻑한데

세상 질서도 어지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여유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서로 옳다고 자기주장만 하고 듣지 않습니다.

이해득실에 빠르고 결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서두릅니다. 초조한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교회 앰프 용량이 작아서

볼륨을 조금만 올려도 “삐—“하고 듣기 힘든 소리가 나듯이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남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경고음을 냅니다.

듣기 힘든 ‘삐—’소리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넉넉함을 잃어버린 소치일 것입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웬만해서는 ‘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앙과 마음, 인격의 용량을 넓혀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이니

하나님 자녀라는 느긋함, 넉넉함, 자긍심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함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지만,

우리 삶에 여백을 남겨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차고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근사한 삶도 기대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16:11)

 

 

 

하나님,

우리 마음과 삶에 넉넉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 이-메일 목회 서신)

꼭 필요한 근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우리 안에서 독버섯처럼 생기는

염려, 불안,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것들까지 친히 맡아 주시고 돌보심을 확인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 불안, 두려움이 생기면

우선 멈추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몰아내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이나 상담을 비롯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도

마땅한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염려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요 없는 염려, 해결할 수 있는 염려, 과거에 대한 염려,

일어나지 않을 염려, 불가항력적인 염려.

 

예를 들면, 필요 없는 염려는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 팀의 승리를 놓고 안절부절 염려하거나

유명인의 기사를 읽고 괜히 그들을 걱정해 주는 것,

해결할 수 있는 염려는

해결하면 될 일을 괜스레 염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염려는

이미 지난 일이어서 염려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일어나지 않을 염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사서 염려하는 것,

불가항력적인 염려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염려의 5%에 해당한답니다.

 

3.

우리는 염려를 갖고 삽니다.

염려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염려가 생길 때,

그 자리에서 <우선 멈춤>을 외치고

기도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염려를 막는 백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소위 쓸데없은 것임도 꼭 기억합시다.

 

4.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염려]과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을

명쾌하게 구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돌아보며 근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의 끝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근심은 믿음 가운데 통제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로 근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

 

 

하나님,

우리의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25 이-메일 목회 서신)

조바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처음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30대 후반의 늦깎이 유학생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공부를 시작했으니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도 헛되게 쓸 수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점수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고 순항하고 있었는데,

한 과목에서 점수가 기대보다 덜 나왔습니다.

그리 중요한 시험도 아니었는데,

마음도 상하고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점수는 올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는 한 과목 점수에도 조바심을 하고 속상해했습니다.

 

2.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당시에는 너무 크게 보여서

집착하고 실망하고 마음 상했던 일이 꽤 많습니다.

 

계획한 일 전체가 망가지거나

인생 전체가 무너져서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불안에 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조바심은

바라고 계획했던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조바심이 찾아오면, 갖가지 경우의 수들이 생각나면서

모든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이 멀어만 가고, 광야 생활이 길어지면서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잘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왔냐고 모세를 향해서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압제와 학대받을 때를

그리워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바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일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인생사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 여지없이 ‘조바심’ 불쑥 찾아옵니다.

 

조금 멀리 보고 갑시다.

조바심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나갑시다.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29:11)

 

 

하나님,

마음속의 조급함을 통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8 이-메일 목회 서신)

미소 되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이어서

반강제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

미소를 잃은 것이 아쉽다는 목요 서신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미소”입니다.

이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로 인사했습니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마스크 안에서 미소를 짓지만

서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조금 허전하고 삭막합니다.”

(2020년 5월 28일 목회서신)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과연 마스크를 벗을 날이 찾아올지 막막했습니다.

 

지난 5월 여행을 떠나면서

짐을 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40일 가까운 여정입니다.

기차 여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 항공사들의 짐 규정이 까다로웠습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는 꼭 챙겨갔습니다.

 

여행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생소한 나라에서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마스크 착용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곤 했거든요.

 

외국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우리 역시 마스크 착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맨 얼굴로 다녔습니다.

 

유럽의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예전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이 생각날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파리의 지하철에서도,

유명한 그림이나 조각상 앞에 빼곡하게 모인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지만,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2.

온 인류를 괴롭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 놀랍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이런 날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스크 뒤에 숨겨놓았던 미소도 되찾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도 미소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음껏 웃어야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아름다운 미소로 정겹게 인사해야겠습니다.

 

무뚝뚝, 무표정이 아니라

활짝 웃으면서 서로 인사합시다.

교회에서는 물론,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로 인사합시다.

날씨도 덥고, 속상한 뉴스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미소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9)

 

하나님,

밝은 세상을 만드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1 이-메일 목회 서신)

길동무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두 달 간의 안식월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선물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필요한 재정을 제공한 미국의 재단,

안식월을 가도록 허락하시고

교회를 섬겨 주신 참빛 식구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목요 서신을 받아 보시는 지체들 가운데

안식월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연락을 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주 서신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고  관심 가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2.

가족 여행을 포함해서

50일의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제는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반지의 제왕>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여행은 위험한 것이다.

집에서 나가면 어떤 운명이 닥칠지 모른다.”

 

지난 5월 6일, 여행을 떠날 때

기대와 불안함이 교차했습니다.

유럽의 대도시는 소매치기가 다반사라는 정보부터

기차를 타는 것, 정해진 숙소에 제날짜에 맞춰서 들어가는 것,

예순이 넘은 부부가 건강하게 여정을 끝낼 수 있을지 까지

영화 대사대로 집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아- 이래서 여행을 떠나는구나”하는 마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3.

영국 런던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태리, 그리스까지

40여 일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몇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우리가 가려는 곳을 찾지 못해서 캠퍼스를 헤매고 있을 때,

법을 전공한다는 대학원생이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분명히 바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길을 물었는데,

상냥하게 끝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일부러 인지 영어를 못하는 척하면서 지나친 경우도 꽤 있었거든요.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는 저와 아내가 따로 앉게 되었습니다.

둘이 같이 앉기 위해서 옆에 있는 신사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더니

생색을 내면서 딱- 잡아뗍니다. 머쓱했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가 편할 수 있는데,

자존심인지 아니면 우리 부부가 함께 가는 것에 대한 시샘인지 완강했습니다.

그 신사의 불친절한 표정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래도 저희가 묶은 에어B&B의 아랍인 여주인,

길을 묻는 우리의 짐까지 들어주겠다던 독일 시골의 장난꾸러기 십 대들,

군말 없이 무거운 짐가방 두 개를 트렁크에 실어주던 아테네 택시 운전사,

시부모님같은 우리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눠준 서울에서 온 신혼부부까지

기억에 남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부부는 과연 다른 여행객들에게

어떤 길동무가 되었을 지 궁금합니다.

 

4.

집을 나서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여행길이지만,

곳곳에 좋은 길동무들이 있으니

위험이 한결 줄고 편안하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좋은 길동무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커다란 축복입니다.

 

다시 매주 보내드릴 목요 서신도

여러분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잠언13:20)

 

하나님,

우리 모두

서로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는 길동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4 이-메일 목회 서신)

변화

제가 5월과 6월에 안식월 갖게 되어서

동안 목요 서신은 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복음 4장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새로운 사건임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땅에 가십니다.

유대인 남성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 여성에게 말을 거십니다.

땅끝을 살고 있던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일을 예수님께서 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전하신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복음을

사마리아는 물론 땅끝까지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사건이기에

인류 역사를 예수님 전과 후(BC and AD)로 나누는 것은 당연합니다.

 

2.

지금부터 62년 전,

아칸소(Arkansas)에서 시작된 한 잡화점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성장했습니다.

 

오클라마호마의 농장주 아들이었던 샘 월튼(Sam Walton)의 가족은

대공황을 맞아서 미주리로 이사합니다.

월튼은JC Penney에서 월 75불을 받고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고향에 돌아온 월튼은

장인에게 빌린 2만 불을 갖고 잡화점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월튼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상품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싼 가격으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종횡무진 뛰었습니다.

물론, 그의 저가 정책이 주변의 상점에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샘 월튼이 시작한 월마트 사업은

훗날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기술 혁명에 버금가는

백화점 사업의 혁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샘 월튼은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3.

월마트가 새로운 브랜드 “Better Goods”을

시작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Whole Foods 이나 Trader Joe’s와 경쟁하기 위해서

양질의 식료품을 저가로 공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이 착수하는 브랜드이니

얼마나 많은 숙고와 연구를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브랜드에 창업자 샘 월튼의 이름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창업자이고

여전히 그의 가족들이 소유는 물론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변화된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옛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꾸준한 변화를 통해서 월마트가 지금의 위치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4.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위에 걸맞게 성품이 변하고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알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날을 사시고

인생과 삶에 새로운 장(chapter)을 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믿음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나님,

어김없이 새날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저도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5. 2 이-메일 목회 서신)

갈라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이 지나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과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만 존재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푸른색의 민주당과

빨간색의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있는 국민들도 많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에 나서거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공감대를 찾지 않고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으니

빨간색과 푸른색만 눈에 띌 뿐입니다.

 

2.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기는

정치, 문화, 경제 전반의 현상입니다.

 

포퓰리즘은

자기들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점점 극단적인 의견이나 정책을 제시합니다.

현실성이 없어도 일단 발표하고 봅니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대중의 요청이나 필요를 무시했기 때문이랍니다.

 

기득권에 취해서 국민들을 챙기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을 때,

포퓰리즘을 내세운 그룹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제 몫을 못 할 때, 이단이 판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은 갈라치기의 명수입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3.

갈라치기가 유행인 세상은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포퓰리즘이 가세하면

세상은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만 옳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포퓰리즘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기를 힘입어 세상을 갈라놓지 않으셨습니다.

 

경계를 허무시고, 차별을 폐지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악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셨지만,

선한 길을 가려는 모든 이를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

예수님이시라면 호되게 꾸짖고

희생자들을 감싸안으시고, 둘을 하나 되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추한 모습이 정상은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품는 예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이라고 갈라치지 않고

‘우리’라고 품어주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생명의 복음, 화해의 복음,

용서와 회복의 복음이 세상에 편만 하길 기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

 

 

하나님,

주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2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