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성경 통독에서

모세오경의 마지막인 신명기를 마쳤습니다.

신명기는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모세의 설교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틈만 나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불평했고, 원망했으며,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모세와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결국 이집트를 나온 성인 남녀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할례조차 받지 못했던 2세들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함께 할례를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모세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의 땅이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할 땅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드디어 이루실 참입니다.

 

그렇게 다 보여주고, 말씀하신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신34:4)

 

모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어쩌면 눈을 감고 두 주먹을 불끈 지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가고 싶은 약속의 땅입니까?

 

모세는 여전히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숨을 거둡니다.

 

3.

성경은 모세를 향해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민12:3).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청년 모세는 혈기가 앞서서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모래에 묻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숨어지내면서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가장 적합한 성품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백성들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모세가 온유한 성품을 갖추지 못했다면

불평과 원망이 일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 40년을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라면 크게 반발했을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입니다.

 

4.

온유(gentleness)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순종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모세뿐 아니라 예수님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세상이 많이 각박합니다. 온유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신의 몫을 챙기고, 나만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바이러스 사태처럼 어려움을 겪고 나면

서로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 하나로 어울리는 세상이 되면 좋겠는데

반대로 분열과 미움, 갈등의 세상으로 변할까 염려됩니다.

이웃을 향한 따뜻한 배려가 온유인데 말입니다.

 

우리 참빛 식구들이 세상에서 온유함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그랬듯이 어려움이 온유함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기 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 12:3)

Now the man Moses was very meek,

more than all people who were on the face of the earth(Num 12:3)

 

하나님 아버지,

온유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고

더불어 살아가는 넉넉한 세상이 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3.5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 (5)

    –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두 번째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불어닥친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역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지내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온전케 해주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영적인 세력인 귀신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가다라”는 데가볼리에 속한 마을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같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막 5:1-20).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힘이 무척 세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밤낮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을 갖고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군대(6천 명에 달하는 로마 군대 조직 레기온)라고 불리는 큰 귀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귀신들린 두 사람이 몹시 사나워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소리 지르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자연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자신들을 괴롭히러 오셨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요한 계시록에서도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세력이 모두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들이 소멸될 시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있어서 더욱 강력하게 활동했을 것입니다.

 

귀신들이 자신들을 돼지 떼에게 넣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향해서 “가라”하시니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나와서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는 비탈을 내리 달아서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돼지의 숫자가 2천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을에 알렸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님께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곳은 유대 땅이 아닌 갈릴리 건너편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악한 귀신이 부정한 동물 돼지에게 들어가길 원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 2천 마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 들린 두 사람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온전케 회복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통제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방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河-

바이러스 2

좋은 아침입니다.

 

1.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폐렴 바이러스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심각성을 느끼기 어렵지만,

한국은 물론 당사자 중국이나 인접국 일본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태랍니다.”

 

2월 첫 주에 보내드린 목요 서신 서두입니다.

그렇게 지나갈 것 같았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을 혼란해 빠뜨리고 있습니다.

 

치사율은 낮다고 하지만

그래도 노약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전염되는 경로와 속도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서

순식간에 바이러스 확진자의 숫자가 늘고 있습니다.

미국도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2.

한국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전염시킨 주범은

다름 아닌 신천지라는 사이비/이단입니다.

 

신천지의 장막 성전이 1960년대에 시작되었으니

역사도 길고 끈질긴 조직입니다.

현재 신천지는 1984년 교주 이만희가 시작한 장막성전이 모체입니다.

전국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따서 12구역으로 나눴습니다.

해외까지 수십만의 신도들이 신천지에 빠져 있습니다.

 

교주 이만희에게 재림 예수의 영이 임했다고

그를 신처럼 받드는 사이비 단체입니다.

대부분의 이단이 그렇듯이 요한계시록을 강조하고

소위 성경을 영적(알레고리)으로 해석합니다.

교주 이만희는 1970년 한국을 강타했던 이단

전도관에서 이단의 운영 기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추수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기존 교회에 침투해서 아주 신실한 교인 행세를 하고

나중에는 신천지 출신의 목사를 세우는 수법으로 기존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신천지 교인인 것을 가족에게도 숨기면서

활동하는 기생충 같은 이단입니다.

 

3.

하필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밀 조직인 신천지에 붙어서

한국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

서울 대형 교회들 까지

이번 사태는 이상하게 기독교와 연관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천지의 실체를 명확히 알지 못하니

(이번 보도를 통해서 많이 알게 되었지만)

대략 기독교 또는 교회를 비난합니다.

가뜩이나 실추된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더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선, 사태를 수습해야 하니 한국의 교회들과 교인들이

보건당국의 지시를 잘 따라서 바이러스를 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4.

사이비 신천지로 시작되었지만,

교회 또는 기독교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립니다.

믿음만 앞세울 뿐

상식이나 지각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비난도 듣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런 때일수록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할 일은 없을까?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거리에 버려서 밝힐 뿐이라는 예수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급선무는 바이러스를 잡는 일입니다.

행정당국, 누구보다 의료진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동시에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의 자리에서,

기독교인의 자리에서 이번 사태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 5: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shall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people’s feet. (Mat 5:13,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국 대한민국을,

주님의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2.27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 (4)

–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9장을 중심으로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다음에 나오는 본문인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연거푸 등장합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중간 중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서 (8:18-22) 알려주시고 실제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9-13).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마비된 로마 백부장의 종을 일으키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의 벽과 경계를 허물고 지우셨음을 배웠습니다. 나병 환자나 백부장의 경우, 벽을 넘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베드로 장모는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을 통해서 나병은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종교적 경계, 로마 군대 백부장에게 있던 민족과 신분의 경계,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질병뿐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배에 올랐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여정입니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서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8:25)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서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무서워했습니다.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주무시고) 계신 것 같을 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통해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 河-

균형

좋은 아침입니다.

 

1.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폐렴 바이러스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심각성을 느끼기 어렵지만,

한국은 물론 당사자 중국이나 인접국 일본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태랍니다.

 

전염병이 돌면서 균형이 깨지니

경제도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애플 아이폰의 경우

중국 생산공장의 차질로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고 있답니다.

 

2.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매사에 “균형(balance)”이 중요합니다.

 

일과 쉼의 균형, 직장과 가정의 균형,

육체와 마음, 그리고 영의 균형,

건강을 뜻하는 몸의 균형,

신앙과 생활의 균형,

자녀 교육의 경우 훈육과 격려의 균형 등등.

 

평균대 위에서 연기하는 체조선수들이

균형을 잃으면 삐끗하고 평균대에서 떨어지듯이

우리도 균형을 상실하면 흔들거리거나 무너져 내립니다.

 

또한 지나치게 균형을 강조하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을 균형을 쫓다가

신앙도 미지근하고, 생활도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는 경우입니다.

 

3.

어느 순간에는

<선택과 몰입>이 필요합니다.

 

곧 사순절이 다가오는데

신앙을 위해서 시간을 떼어놓고 에너지를 쏟으면서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 외에 주중까지 교회 봉사에 힘쓰다가

삶이 망가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선택과 몰입을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4.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를 내려 주시지만

우리는 은혜와 침묵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손길이 눈에 보이듯이 임합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도 길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평균적으로 임하는 것을 봅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에

오늘도 차분하게 주의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연결해 주시고

궁극적으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과 확신을 갖고

우리 앞에 있는 벽과 경계를 넘어서 주님께 나갑니다.

 

삶에 밀려오는 폭풍우를 막아낼 힘과

벽을 뚫고 나갈 용기와

삶의 균형을 이룰 하늘의 지혜를 구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고후 8:13)

I do not mean that others should be eased and you burdened,

but that as a matter of fairness (2Cor 8:13)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균형을 회복시켜 주소서.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고, 균형을 이루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2.20 이-메일 목회 서신)

다같이 섬김

교회가 세워지는데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손길이 없으면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를 세우는 모든 손길이 귀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여느 교회처럼 소위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두고 억지로 배치하거나 일을 하도록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사역은 감히 시작하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맡을 분들이 계시고 그 일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와 맞을 때 실시할 뿐입니다. 때로는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그동안 우리 교회가 추구했던 사역의 방향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사역이 많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에 집중합니다. 샌프란에 계신 권사님들 중심의 수요 예배와 새벽기도회는 이런 사역을 지원하는 시간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속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남을 갖지 못할 때도 있지만, 가능한 대로(할 수 있는 만큼) 모이는 데 힘씁니다. 대신, 이 모든 것이 자원하는 손길로 이뤄지는 것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사역이 있습니다. 점심 친교와 설거지입니다. 주일예배가 점심 친교 즉 사랑의 애찬까지 이어지기에 점심 친교 자원이 필요합니다. 넉 달에 한 번씩 자원을 받으니 일 년에 세 번 섬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자원하는 손길들로 채워졌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설거지는 접시를 닦는 기계를 기증받은 이후 한결 쉬어졌습니다. 예전에 쓰던 종이 접시도 덜 쓰게 되었으니 환경운동에도 참여하는 셈입니다. 그래도 백여명 가까운 점심 설거지가 만만치 않게 나옵니다. 그동안 속회 별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담당했는데, 이번 주부터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여섯 개의 설거지 조를 만들었으니 한 달 반마다  돌아오게 됩니다. 주일 오후에 모임을 갖는 청년부를 한 조로 만들고 (물론 청년부의 한두 분을 지원받았음) 나머지 조들은 기혼 그룹과 어르신 그룹을 합쳤습니다. 설거지를 하시면서 서로 교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설거지 조에서 다음 사항을 꼭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째, 자신이 속한 설거지 조를 꼭 확인하시고, 주보에 다음과 이번 주 설거지 조에 자신의 조가 있다면 가능한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최소 인원을 배치하다 보니 결석하시면 다른 조의 지원을 받아야 가능해집니다. 둘째, 조장님들께서 담당자들을 배정해서 분업으로 설거지를 하시면 적은 인원으로 무난히 설거지를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엌 설거지와 쓰레기만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모두 가신 후에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궂은일이지만 마음을 합쳐서 섬길 때 기쁨과 보람이 배가될 줄 믿습니다. 은밀히 교회를 섬기는 참빛 식구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 河-

있는 그대로

그럴수록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처럼, 시편 기자처럼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진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진술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임하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자체로 우리 마음속에 평안, 위로, 소망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움직이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But I, O LORD, cry to you; in the morning my prayer comes before you (Ps 88:13)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 드리는 참빛 식구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2.1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