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극적인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던

어거스틴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청년 시절에

육체의 쾌락과 야욕에 빠졌던 자신을 돌아보며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원 밖에서 들리는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들고 펼친 말씀이 로마서 13장 13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3)

 

어거스틴은

자신에게 딱- 맞는 말씀을 마주 대하고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물론, 우연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씀이니 덮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 순간 “확실성의 빛”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2.

터닝 포인트는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간이 인생 전체를 바꿔놓고

존재 자체가 180도 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날의 모든 경험이 응축되는 과정을 거쳤고

모아진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하면서

존재와 삶 전체를 완전히 바꿨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거스틴 역시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는 종교와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집요한 추구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성찰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회심 후에도

성경, 신앙, 자신의 삶을 성찰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내적 곱씹기의 열매가 바로 “고백록”입니다.

 

3.

필요 없는 것을 끝까지 쫓는 것은

내려놓아야 할 집착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 진리, 하나님을 끝까지 추구하고 곱씹는 것은

신앙 여정에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대충 넘어가지 말고

한 가지라도 깊이 탐구해 봅시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깊이”있는 신앙 –

곱씹고 읊조리면서 내면 깊이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올가을이 되길 바랍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 13:13-14)

Let us walk properly as in the daytime, not in orgies and drunkenness, not in sexual immorality and sensuality,

not in quarreling and jealousy.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gratify its desires. (Rom 13:13-1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주님 안에서 깊이 깊이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8 이-메일 목회 서신)

무라드와 무퀘게

좋은 아침입니다.

 

1.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별히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두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라드는 2014년 ISIS에게 엄마를 잃고

자신은 성노예로 팔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25세 여성입니다.

 

이라크의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출신인 무라드는

ISIS에서 탈출한 이후 여성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성노예로 살았던 칠흑 같은 경험을 떠올리며

여전히 노예처럼 붙잡혀 있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극복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돕는 일에 나선 20대 중반의 여성

무라드가 대단해 보입니다.

 

올해 63세인 무퀘게는

아프리카 콩고의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20년동안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치료와 재활을 도왔습니다.

그가 치료한 여성이 3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통해서

무퀘게 한 사람이 펼친 사랑의 의술이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새 삶을 주었는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무퀘게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병원을 접고 콩고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여전히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돌아와 병원을 열었고,

그에게 치료받은 여성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면서

무퀘게와 그의 병원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일은

무퀘게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목숨을 건 그의 희생적 사랑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일 것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무퀘게는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곳에 병원을 열었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연약한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고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노벨 평화상에 손색이 없습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하고 험하지만

곳곳에서 말없이 희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분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처음 시작은 미미했을 것입니다.

우연히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너무 험해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지난달 우리 교회 <작은사랑나눔> 헌금도

일본 우토로 한인 마을에 찾아온 평화를 기념하는데

귀하게 사용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참빛 식구들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 데 자연스레 사용되는

주님의 손길/섭리가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Truly, I say to you, as you did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my brothers, you did it to me. (Mat 25:40)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묵묵히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손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1 이-메일 목회 서신)

염려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감사함으로…

[모든 염려 거리를] 하나님의 귀까지 배달하라”(빌4:6)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많은 분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익숙한 말씀인데

한 주간 설교에 할애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그만큼 염려하면서 살아가기에

빌립보서가 알려주는 <염려 관리법>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쉬지 않는] “기도”

모든 염려에 대한 구체적인 “간청”

그리고 “감사”였습니다.

 

특히, 쉬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염려가 습관이 되면, 기도가 무너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염려가 차지합니다.

염려한다면,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기도뿐만 아니라 기쁨과 감사도 잃어버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그토록 염려하던 바로 그 내일입니다.

Today is the tomorrow we worried about yesterday. (Author unknown)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으면,

작년 이 맘때 우리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꿋꿋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마6:34).

 

염려가 생기는 그 자리, 그 순간에

주저말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기도가 염려를 다스리는 힘임을 우리 모두 경험합시다.

기도는 염려를 물리치는 하늘의 묘약입니다.

 

2.

염려는 나쁜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상상(imagination)입니다.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추한(ugly) 상상입니다. 소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기도와 감사 가운데 선하게 사용합시다.

 

산이 옮겨지는 것을 상상하고,

아기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늑대와 이리가 함께 지내는 세상을 상상하고

주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이뤄질 것을 상상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느끼는 영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히 염려를 다스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근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살리는 선한 말을 건넴으로 주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임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12:25)

Anxiety in a man’s heart weighs him down, but a good word makes him glad.

 

하나님 아버지,

기도로 염려를 다스리고

염려 속에 있는 가족과 이웃을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 20 이-메일 목회 서신)

허리케인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샌프란과 베이 지역의 날씨는

말 그대로 쾌청입니다.

종종 산책을 하다 보면

우리가 사는 지역 날씨를 저절로 예찬하게 됩니다.

 

적당히 덥고, 적당히 선선하고

(물론 교회 근처는 조금 춥지만)

무엇보다 파란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자연 치유가 되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히 좋은 날씨를 즐기고 있는 동안

미국 동부 해안으로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플로렌스라는 3등급의 허리케인입니다.

카테고리 3은 2005년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를 강타한

태풍 카트리나와 같은 급입니다.

(원래 4등급으로 시작했는데, 현재 2로 강등되었습니다)

 

시속 120km정도의 강풍과 심하면 40인치의 비를 쏟아냅니다.

나사가 찍은 사진에 “태풍의 눈”이 명확히 나타날 정도입니다.

 

이제 곧 미국 동부 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태풍 영향권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사는

백만 명의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습니다.

 

육지에 상륙함과 동시에 태풍의 위력이

더욱 약해지길 기도합니다.

 

2.

우리가 쾌청한 날씨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동안

동부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허리케인을 피해서 대피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습니다.

 

어디 허리케인뿐일까요?

우리가 어울려 살고 있는 지구 어딘가에서는

가난, 재해, 질병, 전쟁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는 말씀을 나눴는데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살면 되고

우리 지역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은 정말 금물입니다.

 

나만 힘든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힘겹게 사는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분들을 생각하고 함께 울 수 있는 것이 관용입니다.

 

3.

동부에 상륙한다는 허리케인으로 인해서

인명이나 재산 등 피해가 최소화되길 바랍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고,

물론 우리 참빛 식구들 가운데서 홀로 속앓이를 하고 있을 분이 있을까도 헤아려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Let your reasonableness be known to everyone. The Lord is at hand. (Phil 4:5)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각이 넓어지고

많은 것들을 참아내고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 13이-메일 목회 서신)

                   

 

다름과 틀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설교에 등장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웠던 여성들인데

무슨 연유인지 둘의 관계가 깨져서 교회에 해를 입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한없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하나 됨이 중요하기에

빌립보에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여성 지도자들에게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던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다툼과 허영(rivalry and conceit)”으로 인해서

주도권 다툼을 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력과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하다가

두 여성이 부딪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라갔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 모두 성품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지 못한 채 지도자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2.

성숙한 신앙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압니다.

 

내가 말한 것만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것은

어리숙하고 초보적인 사고요 신앙입니다.

매사를 자기 관점에서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면

당연히 관계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바울의 권면대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일 설교에서 같은 마음은

1) 상대방에 동의하고,

2) 공감대를 갖고

3) 조화와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컬러와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존중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3.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슈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름의 문제를 놓고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니 관계가 깨집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면

다툼과 분열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복잡한 것만큼

다름의 문제도 쉽지 않고 까다롭지만

“주 안에서”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입니다.

 

4.

실제로

옳고 그른 것을 다루기는 쉽습니다.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름의 문제를 갖고 동의와 조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애씀, 양보, 경청,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욱 값진 일입니다.

 

오늘 하루

다양한 삶의 환경,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Let your reasonableness be known to everyone. The Lord is at hand. (Phil 4:5)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평화(샬롬)가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5이-메일 목회 서신)

슬픔의 노래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

예레미야 애가(Lamentations)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한 후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면서 부른 슬픔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자초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바벨론 군대가 성전까지 들어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은 이국 땅에서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고향에서 칠흑 같은 밤을 살고 있습니다.

 

2.

성경에서 예레미야 애가와 비슷한 문학 형식이

시편의 탄식시입니다.

 

어려움이 계속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을 향한 탄식인 “언제까지니까(How long)”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오, 주님”

 

이렇게 하나님을 부른 후에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합니다.

마음을 토해내듯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탄식은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가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탄식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큰 차이입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확신을 갖고 나니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로 초대합니다.

 

탄식이 변해서 확신이 되고

감사와 찬송, 그리고 전도로 발전하는 것이

시편 탄식시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탄식은

신세 한탄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갖습니다.

 

탄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과 도움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탄식이 변해서 기쁨이 되고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돕게 됩니다.

 

3.

예레미야 애가는 5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가운데 3장이 소망의 말씀입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침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애가 또는 탄식의 묘미가 있습니다.

 

누구나 탄식없이 인생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생사 고락, 희로애락이 겹쳐서 찾아오는 삶 한가운데

“주여”를 저절로 부르게 됩니다.

 

탄식이 기쁨이 되고,

탄식 속에서 경험하는 주의 은혜가 참빛 식구들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But I have trusted in your steadfast love;

my heart shall rejoice in your salvation. (Psalms 13:5)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결국에는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8. 30이-메일 목회 서신)

인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광고시간에

교회 앞 나무에 열린 미국 배 사진을 소개했습니다.

두 개가 열렸는데 저에게는 꽤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배나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냥 정원수인 줄 알고, 때가 되면 가지를 쳐주었습니다.

물론 제 안목이 없어서 배나무를 몰라 본 것은 죄송한 일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7년 동안 한 번도 열매를 맺지 않다가

올해 들어서 쌍둥이 열매를 맺었는지요!

 

올가을 우기가 시작되면

더욱 정성껏 가지치기도 해주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사과며 자두가 많이 열리지 않지만,

배나무로 판명이 났으니 더욱 마음을 주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열매가 없으면 도대체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 나무를 꾸짖으시던 장면도 생각났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찾아 가셨지만,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저주로 뿌리까지 말라서 죽는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를 가리켰습니다.

 

유대교가 겉으로는 번드르르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이 없고, 열매가 없더니

결국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에 소개했던

씨 뿌리는 비유 속의 좋은 밭도 생각났습니다.

 

좋은 밭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뜻합니다.

말씀을 듣고 끝까지 지키는 힘을 갖고 있어서

결국 인내로 결실하는 마음과 삶입니다.

 

3.

지난 주일 설교였던 푯대를 향하는 신앙 여정은

쉽게 결판나지 않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소낙비처럼 경험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꽤 지루하고 끈질긴 경주입니다.

그 경주에서 꼭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

마지막 결승점에서 두 손 벌려 우리를 맞으실 예수님,

달리는 동안에 우리에게 힘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지만

7년 만에 열매를 맺은 배나무의 내공과 인내가 필수적입니다.

 

신앙은 물론 삶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실제가 되고

“믿음으로 사는 것”

“예수님께서 붙들려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증할 수 있기 원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5)

As for that in the good soil, they are those who, hearing the word, hold it fast in an honest and good heart, and bear fruit with patience. (Luke 8:15)

 

하나님 아버지,

인내로 결실하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시고

주님 붙잡고 푯대를 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23이-메일 목회 서신)

우토로 마을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는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광복절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적어도 삼일절이나 광복절은 기억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욱, 우리 샌프란시스코는

한인 이민은 물론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습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이민 온 한인들이 본토로 진입하는 관문이었고,

190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샌프란 유학과 한인회 조직,

1908년 장인환/전명운 열사의 일제 앞잡이 스티븐슨 저격 등

한인 이민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샌프란 도심(St. Mary Square Park)에

위안부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지요.

기회가 되면, 특히 자녀들과

샌프란 한인들의 발자취를 답사해도 뜻 깊을 것 같습니다.

 

2.

1941년 일본 교토 비행장 공사를 위해서 끌려온

한인들이 모여 살던 <우토로>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해방 70년을 맞은 2015년에

MBC 무한도전팀이 방문해서 감동을 주었던 곳입니다.

 

비행장 공사를 위한 인부 2천 명 가운데

1300명이 조선인이었답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현재까지 한인 촌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공항을 만들기 위해서 언덕을 깎고 웅덩이를 만든 곳에

집단 주거지를 만들었기에 비가 조금만 와도 침수가 됩니다.

일본 정부가 상/하수도 등 사회 제반 시설을 해 주지 않아서

무척 열악한 환경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닛산 자동차 그룹이 대지를 매입해서

수십년 터전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2007년 한국의 시민단체와 정부의 지원으로 재건축이 기능해졌답니다.

 

일본 한가운데서 “섬”처럼 살아가면서도

이들의 구호는 “에루화 좋다”입니다.

한국학교를 세워서 우리 말과 문화를 보존하는 등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인으로 살아온 대표적인 공동체입니다.

 

*우토로 마을에 대한 영상은 많습니다. 아래는 한인 3세가 안내하는 방송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X2Qezv3ucI

 

3.

샌프란에 처음 정착한 한인들이나

일본 토쿄 우토로 마을의 한인들은

떠나온 조국을 마음에 그리면서 혹독한 세월을 견뎠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견디는 것이 힘이요 믿음입니다.

살아남고, 우리가 있는 현장이 간증이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시절 불렀던

광복절 노래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2절이 참 좋습니다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고 세계를 비추는 빛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16이-메일 목회 서신)

늘 그리운 곳

 

좋은 아침입니다.

 

1.

점심을 먹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으니

둘째가 “아빠는 바닥이 좋아?”라고 묻습니다.

 

저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셀폰을 확인하거나 책을 볼 때가 많은데

둘째가 보기에 불편하게 보였는지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우라는 것입니다.

 

“응. 사실 아빠는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옛날 할머니 집 마루가 생각나거든.

여름이 되면 시골집 마루에 누워서

책도 보고, 생각도 하고, 낮잠도 자고 그랬어.

문을 열어놓으면 바람이 솔솔 불고 너무 시원했지.”

둘째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 집 거실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30-40년 전 시골집 마루에 누운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 옛날 시원한 대청마루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2.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교회가

샌 부르노 공원으로 야외 예배를 다녀왔습니다.

세 번째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갔는데 갈 때마다 참 좋습니다.

 

한적해서 마음까지 편안해지고

쉼터가 있어서 햇볕도 막을 수 있고

고기를 굽는 그릴도 넓고 커서 일하기 편하고

우리 교회 야외 예배 장소로 안성맞춤입니다.

 

다음 야외 예배 때는 또 어떤 분들이 함께 하실지,

우리 권사님들께서 모두 건강하시고

아이들은 부쩍 크고, 교회도 나름 더 자라 있기를 바라면서

2년 후의 야외 예배를 기약했습니다.

 

그렇게 야외 예배를 마치고

마지막 정리를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교회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매 주일 오던 참빛 식구들이 교회에 오지 않았으니

우리 교회 “건물”이 섭섭했나 봅니다.

 

다음 주일 교회에서 예배할 것이 기대되었습니다.

예배는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더 은혜로운 법이지요!

 

3.

우리 모두에게는

추억에 잠기게 하고

앞일을 기대하게 하며

언제나 가고 싶고 그리운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곳에 가면 힘을 얻습니다.

그곳에 가면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게 마련인데

참빛 식구들께 우리 교회가 바로 “그 장소”가 되면 좋겠습니다.

힘든 세상살이의 피난처가 되고

새 힘을 얻는 재충전의 장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고

좋은 분들이 함께 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더불어 결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워가기 원합니다.

 

(물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언제나 sweet home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이 함께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예쁜 우리 성전에서

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시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 133:1)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욱더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9이-메일 목회 서신)

마음의 교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빌립보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인 할례주의자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빌 3:2).

 

바울은 이들을

“개”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개라는 비유로 시작해서

그들의 행위가 악함을 알려주었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악한 행위가 할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꼭 붙들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우쭐대던

유대교 배경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할례와 구약의 율법을 놓지 못하고

그것을 손에 쥐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을

“불쌍한 이들” “가난한 사람들(에비오니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사라졌습니다.

 

2.

이 사람들이 할례를 비롯한

구약의 율법을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들 안에 있던 “교만”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정통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만,

할례를 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교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할례를 포기하지 못한 채 기득권으로 여기던 교만이

이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아니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요예배에서 배우는

예레미야서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방 민족들의 교만도 소개합니다.

 

이집트, 모압, 암몬, 다메섹, 바벨론과 같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강들은

자신들의 국력, 산업, 역사를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면서 그 틈을 타서 자신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으로 합리화될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의 국력을 앞세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열강과 이스라엘을 둘러쌓고 있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차례로 무너뜨리십니다.

재판하듯이 죄목을 하나하나 거론하시면서

결국 “유죄판결”을 내리십니다.

 

3.

하나님 백성들이 교만을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무너지게 됨을

빌립보 교회를 힘들게 한 개들과 같은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이방 민족의 교만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결국 심판하십니다.

 

우리 역시 신앙 가운데 교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일에서도 교만할 수 있고,

마음속의 교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원합니다.

함께 하는 이웃들을 배려하기 원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교만은 물론

마음의 교만도 통제하기 원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As you have always obeyed,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Phil 2:12)

 

하나님 아버지,

겸손이 우리의 인격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2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