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아침,

블랙홀 사진이 최초로 공개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가운데는 검은색이었습니다.

정확한 원은 아니지만, 빛으로 둘러 쌓여 있고

밑에는 빛 광선 두 개가 호수처럼 위치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았던 블랙홀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시간까지 빨아들여서 블랙홀과 우주를 여행하고 온 우주인들이 지구에 돌아왔을 때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할머니가 된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말로만 듣던 블랙홀을 실제로 보게 된 것입니다.

저처럼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마음이 설레었는데

과학자들은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2.

기사를 보면서 그저 신기했습니다.

지구만한 망원경을 조합해서 관측했다는 사실,

망원경의 성능이 달 표면에 놓인 오렌지를 자세히 관찰할 정도라는 것,

블랙홀이 지구로부터 55억 광년 떨어져 있다는 것 등등

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기사를 검색하면서

엉뚱해 보일 수 있지만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이 스쳤습니다.

 

1) 실제 블랙홀 사진이 그동안 영화나 가상(시뮬레이션)으로 보았던 것보다

선명하지 않았고 솔직히 약간 시시해 보였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가짜는 화려하게 꾸미지만,

진품은 시시해 보여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상이 실제보다 더 멋있고 화려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을 살다 보면 시시할 수 있는데, 거기서 의미를 찾는 것이 일상의 신앙입니다.

 

2) 블랙홀 망원경 이름이 블랙홀의 경계선을 뜻하는 <사건 지평/Event Horizon>이었는데

망원경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We have seen what we thought was unseeable.”

 

제가 목사여서 그런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Heb 11:1)

 

블랙홀이 신비에 그칠 줄 알았는데 이번에 사진으로  확인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고 증거가 되는 날이 올 것도 믿습니다.

블랙홀 사진에 비할 데 없는 신비, 경탄, 경외, 그리고 찬양의 순간이 우리 앞에 있음을 믿습니다.

 

3) 무엇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블랙홀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높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이 얼마나 넓고 영원한 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인터스텔라 영화에서 5차원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도 남겠지요.

 

3.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는 고난주간이고 곧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우리 눈으로 보고 경험할 때가 올 것입니다.

기대를 갖고 부활절을 맞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귀하게 간직하기 원합니다.

 

현대 과학에 비하면 너무 순수해 보이지만

당시로써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고백했던 시편 기자가 생각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When I look at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you have set in place,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Psalms 8:3-4)

 

하나님 아버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11이-메일 목회 서신)

 

변덕쟁이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는 만우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만우절만 기다린 적도 있고

만우절에 친구들을 속여먹는 재미가 솔솔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동심(童心)이 점점 잊혀집니다.

 

만우절은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에게 얼른 만우절임과 진실이 아님을 알려야 합니다.

만우절을 잘못 대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2.

만우절을 보내면서 구약성경 요나서를 생각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을 보낼 정도로 혼이 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당시 제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갔습니다.

 

요나는 하루 종일 니느웨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도 임금의 옷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회개했습니다.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행실의 변화가 동반된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짐승들까지 회개에 동참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8-9)

 

죄를 지은 백성에게 벌을 주는 것이 공의입니다.

한번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신실입니다.

게다가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제국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다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은

용어가 적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변덕쟁이”처럼 보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설마” “혹시나”하면서 회개했는데

그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한 것을 본 요나는 매우 못마땅해 합니다.

만우절도 아닌데 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니느웨 사람들도 중요했습니다.

 

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완고하고 융통성도 없이 꽉 막힌 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때로 변덕쟁이로 돌변하십니다.

–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입니다.

우리가 불쌍해 보이면 가던 길도 돌이켜서 우리를 도우실 분입니다.

–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처럼 죄를 뉘우치고 바른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심판도 철회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시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를 위로하시고, 무작정 사랑하시고,

자식을 위해서 뜻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마음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103편 13-14)

As a father shows compassion to his children, so the LORD shows compassion to those who fear him.

For he knows our frame; he remembers that we are dust. (Psalms 103:13-14)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꼭 기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4이-메일 목회 서신)

사이프러스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성경의 식물에 대해서

연속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식물이라고 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식물이 너무 많기에

이번에는 성경 속의 나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나무도 많지만 열 가지만 골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빠진 나무들은 꽤 섭섭해 할 것 같습니다.

포도나무처럼 유명한 것이야 씩- 웃고 넘어가겠지만,

평소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깝게 이번 연속 설교 리스트에 들지 못한 나무가

상록수인 사이프러스(Cypress)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잣나무”로 번역했고, 구약성경에 20회 이상 등장합니다.

 

사이프러스는

잎이 뾰족한 침엽수이고 솔방울과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 나무에 암/수 열매가 함께 열려서 쉽게 번식합니다.

송진이 나와서 나무를 보호해 줍니다.

 

천년 정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물론 고대 근동에서 사이프러스는

“불멸(immortality)”을 상징해서, 묘지 등에 심곤 했답니다.

 

성경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함께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자연 만물에 등장하곤 합니다.

 

2.

사이프러스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본문이

호세아 14장 8절입니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O Ephraim, what have I to do with idols? It is I who answer and look after you.

I am like an evergreen cypress; from me comes your fruit.(Hosea 14:8).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푸른 잣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식물에 비유한 경우가 이곳 뿐인 것 같습니다.

 

사이프러스는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잘 어울립니다.

사이프러스는 언제나 열매(솔방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래 사는 사이프러스의 특징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미지와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이프러스는

비나 햇볕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지가 울창하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무 아래서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그늘이 되시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이프러스 같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세상을 살다 보면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무작정 찾아가서 앉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이프러스에 자신을 비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남은 한주

늘 푸른 잣나무처럼 한결같으신 우리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우리 역시 늘 푸른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원합니다.

 

사소한 일들, 지나가는 순간에 연연하기보다

천년을 사는 사이프러스,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라는 잣대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면서 여유를 갖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시편 104:16-17)

The trees of the LORD are watered abundantly, the cedars of Lebanon that he planted.

In them the birds build their nests; the stork has her home in the fir trees.(Psalms 104:16-17)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늘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에 늘 푸른 상록수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28이-메일 목회 서신)

벧세메스 언덕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성경 통독에서

사무엘상 6장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지만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궤(the ark)까지 동원했지만 속수무책입니다.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의 아들도 전장에서 죽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죽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법궤까지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 상징이었습니다.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니 강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 법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에 볼모로 잡혀간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 인 다곤 옆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 신이 엎드려져 있습니다.

이튿날은 다곤 신상의 머리와 손목이 끊긴 채

몸통만 문지방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궤가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가 생겨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갈 암소 둘을 데려왔습니다.

한번도 멍에를 매지 않은 암소입니다.

게다가 젖먹이 새끼를 가진 암소입니다.

 

멍에를 한 번도 매지 않은 암소가

새끼가 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간다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사건과 사고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확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암소 둘이

새로 만든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처음 매어 보는 멍에와 처음 끄는 수레입니다.

 

집에는 젖을 먹는 새끼들이 있습니다.

암소 둘이 꺽꺽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게다가 언덕을 다 올라가서는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됩니다.

비록 암소들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한 셈입니다.

 

3.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가는 암소 두 마리를 보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조롱, 멸시, 천대, 채찍을 모두 참으시고 좌우로 흔들림 없이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길도 벧세메스의 언덕길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힘겨운 길입니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처음 해 보는 일입니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이 새끼를 두고 왔듯이, 가슴을 쓸어 내리며 걸을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 왜 가야 하는지 모르고 걸을 때도 있습니다.

끝에는 손해(희생)만 볼 뿐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벧세메스(“태양의 집”) 언덕길을 걸어갑니다.

우리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선포되고

주님의 일이 세상에 펼쳐지길 바라며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사순절 셋째 주를 맞는 참빛 식구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벧세메스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삼상 6:12)

And the cows went straight in the direction of Beth-shemesh along one highway, lowing as they went.

They turned neither to the right nor to the left (1Sam 6:12,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벧세메세의 인생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과 동행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21이-메일 목회 서신)

고넬료

좋은 아침입니다.

 

1.

토요일 새벽기도회에서는

사도행전을 한 장씩 읽어 나갑니다.

토요일에만 읽으니 진도는 느리지만

차례대로 꾸준히 성경을 읽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특징입니다.

 

저는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소리없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라면서 목회하고 있답니다.

 

2.

지난 토요일에는 사도행전 10장을 읽었는데

베드로를 통해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고넬료가 어떤 사람인지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이달리야(로마) 부대에서 적어도 100명의 군인을 거느린 백부장입니다.

로마에서 식민지에 파견된 군지휘관이니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 부대라면 세계 최강입니다.

로마 사람이니 로마의 신들을 믿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달랐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들이 믿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주가 되시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2절).

 

당시 유대교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God-fearers)”이라는 명칭만 주면서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신들과 구별했습니다.

일종의 차별인데,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그것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제 9시(오후 3시)에 기도한 것을 보면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는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지난달 속회 공부에서 배운 복음서의 또 다른 백부장이 생각납니다(눅7:1-10).

 

이처럼 고넬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

즉 신앙과 생활의 통합을 이룬 멋진 인물이었습니다.

 

3.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찾아와서

베드로를 초청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같은 시간에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가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니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성경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고넬료를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delivery)되어 기억되신바가 되었으니 (4절).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와 구제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기억하실 테니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생깁니다.

 

신앙과 생활의 통합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는 우리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했던 고넬료의 신앙을 묵상합니다.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던 그의 삶도 본받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씀에서

힘을 얻고 올해 사순절도 우리의 신앙과 삶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10:2)

a devout man who feared God with all his household,

gave alms generously to the people, and prayed continually to God.(Act 10:2, ESV)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기도와 삶을 꼭 기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14이-메일 목회 서신)

신앙에 대해서

좋은 아침입니다.

 

1.

구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구름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보면 하늘에 구름이 뭉쳐서

뭉개 뭉개 떠 있지만,

비행기를 타봐서 알듯이 구름은

그냥 수증기의 모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구름을 잡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허풍입니다.

 

초등학교 국어책에

무지개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어떤 소년이 무지개를 잡으러 들판을 달려갑니다.

앞에 있는 무지개를 좇아서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무지개는 늘 앞에 있을 뿐 잡을 수 없습니다.

 

구름을 잡는 것이나

무지개를 좇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2.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용어와 표현이

구름 잡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선하게 살아야지요

믿음이 적어서요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등등”

–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때도 있습니다.

 

무지개를 좇아가는 모습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면 다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해요.

사랑하기 원합니다. 등등”

– 맞는 말인데, 가끔은 무지개처럼 보이고 들립니다.

 

3.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능하면 구름 잡는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무지개처럼 희망 고문같은 논조도 가능하면 지양합니다.

 

그래도 우리 신앙 자체가 영적인 면이 있고

추상적인 (어려운 표현으로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있기에

세심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구름 잡는 얘기로 빠지기 쉽고

그것을 피하려는 것 자체가 솔직히 불가능할 때도 많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 모습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일 정도로 증거하는 것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제적이길 바랍니다.

추상적이고 영적으로 보이는 신앙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입술과 손과 발로 표현될 때는 구체적이길 원합니다.

 

미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입술,

어렵고 약한 사람에게 슬쩍 내미는 손길,

먼저 가서 궂은 일을 손수 해내는 발길,

악한 말을 몰아내고 선한 말로 가득한 언어습관!

 

믿음으로 살고 은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보여주는

감사, 평안, 기쁨, 찬양, 그리고 자족!

 

2019년 사순절을 맞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눈에 보이도록 표현하고

그대로 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개역개정)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새번역)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Heb 11:1, ESV)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믿음이 증거가 되고 실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7이-메일 목회 서신)

무익하고 헛된 것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2월의 마지막 날을 맞았습니다.

권사님들 말씀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고,

한 달이 때로는 한 해가 순간에 지나감을 보냅니다.

 

또다시 새달을 맞으면서

“세월을 아끼라”(엡5:16 )는 말씀이 저절로 떠오르고

우리 의지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번 주 큐티 말씀은 디도서였습니다.

디도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믿음도 좋았지만 사려 깊고 마음이 따뜻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같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정도였습니다(고후 7:6).

 

바울은 그레데(Crete) 섬을 방문했다가

그곳 교회와 성도들의 삶이 엉망진창인 것을 보고

디도를 그레데 교회의 임시 목회자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레데 교회는 여느 교회가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들은 물론 노예까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레데 섬에 사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게으르고,

거짓말을 일삼고, 때로는 차마 사람으로 할 수 없는 행동을 했기에

“악한 짐승”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디도 1:12).

 

그레데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지만

그들의 삶은 옛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가 그레데 교회를 돕고

그곳에 바른 지도자들을 세우길 부탁합니다.

디도서 1장에 나오는 지도자들의 덕목이 특별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그레데는 물론 그데데 교회가 타락했기에

다른 곳에서는 보통 그리스도인이 그곳에서는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렇게 한 달을 보내고 새달을 맞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그레데 교인들과 같은 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현대인의 교양(?)으로 치장을 해서 보이지 않을 뿐 보기 흉한 생각과 행동들입니다.

주님 앞에 내놓고 회개하지만, 번번이 고쳐지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디도서의 그레데 교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습니다.

 

2월을 보내고 새달을 맞으면서

우리 속에 있는

무익하고 헛된 것(unprofitable and worthless)”을 멀리하기 원합니다.

 

선한 것을 행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또한, 참빛 식구들께서 행하는 대부분의 일은 선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삶 속에서

“무익하고 헛된 것”을 골라서 뽑아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때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디도 3:8)

I want you to insist on these things, so that those

who have believed in God may be careful to devote themselves to good works.

These things are excellent and profitable for people. (Titus 3:8)

 

하나님 아버지,

새달을 맞는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선하고 아름답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28이-메일 목회 서신)

무엇으로 사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달 신문에 실을 칼럼 주제를 생각하다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와서 세 가지 숙제를 해야 하는 천사 미하일과

그를 돌보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몬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미하일에게 주신 세 가지 숙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미하일이 교회 앞에서 헐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을 때

구두 수선공 세몬이 다가와서 미하일을 그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오갈 데 없다는 얘기를 듣더니 구두수선 하는 일에 조수로 써주었습니다.

 

세몬의 따뜻한 환대를 경험한 미하일이 첫 번째 숙제를 마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 부자가 까다로운 조건으로 가죽 장화를 부탁했는데

천사 미하일은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부자의 신발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주인 세몬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부자의 하인이 와서 주인이 사고로 죽었다고 알립니다.

 

천사 미하일은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람에게는

앞길을 미리 아는 예측력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했습니다.

두 번째 숙제도 마쳤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인이 쌍둥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구두 두 켤레를 주문하는데

한 아이의 발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구두 수선공 세몬이 두 아이가 모두 친자식인지, 왜 발을 다쳤는지 물었습니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이웃에 살던 여성의 아이랍니다.

여성이 죽었는데, 그 순간 한 아이 발 위로 넘어지면서 발을 다치게 되었고,

마침 부인에게 두살배기 아기에 있었기에 함께 젖을 먹이며 키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친자식이 갑자기 죽으면서

불쌍한 두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었습니다.

천사 미하엘은 부인을 보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의 답을 찾았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2.

지난 6주에 걸쳐서 함께 나눈 <돌봄>이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톨스토이를 통해서 다시 배웁니다.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구두 수선공이 아내에게 값비싼 외투를 선물하기 위해서 시장에 갔다가

가진 돈으로 술을 먹게 될 것도 예측할 수 없던 일입니다.

기고만장했던 부자가 집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앞을 내다보는 능력은 주지 않으셨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장착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주어진 인생을 아름답게 살라는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으로 삽니다.

 

요즘 아침 큐티 말씀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신학적인 해석, 교리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리고 깊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고 세상과 섞여서 살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잃기 쉽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앞일을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삽니다.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서로 돌보며 살아갑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so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thew 5:44-45)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믿음과 사랑으로 사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21이-메일 목회 서신)

 

밸런타인 데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2월 14일 밸런타인 데이입니다.

밸런타인 데이를 맞아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밸런타인 데이를 연인들 간에 초콜릿을 주고받는 날로만 알고 있는데

그것보다 더 깊은 유래와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발렌타인은 300년경에 순교한 로마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성인 칭호를 받아서 성 발렌타인 (St. Valentine)이 되었습니다.

당시 황제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황제에게 기독교를 전하며 순교했답니다.

 

발렌타인 감독은

그를 지키는 간수의 딸이 앞을 보지 못했는데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순교 전에 그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맨 마지막에

“Your Valentine”이라고 덧붙였답니다.

이후에 발렌타인 카드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월 14일의 특정한 날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지만

발렌타인이 묘지에 묻힌 날이라는 것이 유력하니

그날이 발렌타인의 순교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영국 국교회는 물론 루터교를 비롯한 몇몇 기독교회에서

성 발렌타인 데이를 성일로 지키고 있답니다.

 

2.

발렌타인 데이가 연인 간의 사랑으로 발전한 것은

14세기 영국의 시인 초우서(Chauser)가

밸런타인 데이를 새들이 짝을 찾는 날로 묘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성 발렌타인 데이라네,

새들이 짝을 찾아 떠나는 날.
For this was on St. Valentine’s Day,

when ever bird cometh there to choose his mate

 

그 이후로 영문학에서 밸런타인 데이는

새들이 짝을 찾듯이 연인들의 사랑,

봄이 되는 길목 등을 상징하면서 종종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와 19세기를 지나면서

밸런타인 데이에 카드를 보내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꼭 연인들이 아니어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카드를 보냈는데

우표가 발명되면서 한해에 40만 장의 카드가 팔린 적도 있답니다.

 

1847년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에 있는 카드 회사에서도 밸런타인 데이 카드를 발행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카드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발전했습니다.

2017년 기준으로 발렌타인과 관련된 매상은

미국에서만 182억 불에 달한다니 엄청난 상거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밸런타인 데이에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면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은 일본 회사가 처음으로 시작했답니다.

 

3.

밸런타인 데이의 유래를 알고 나니

기독교인으로 다음과 같이 밸런타인 데이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신앙을 지키면서 순교한 성자 발렌타인을 기억하고,

기적적으로 눈을 뜨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은 간수의 가족도 생각하면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지들이 있다면 카드도 보내고,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밸런타인 데이에 고백하는 사랑이

단지 연인들 간의 사랑인 <에로스>를 넘어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까지 기억하고

서로 나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Happy Valentine’s Day!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So we have come to know and to believe the love that God has for us.

God is love, and whoever abides in love abides in God, and God abides in him.(I John 4:16)

 

하나님 아버지,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과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14이-메일 목회 서신)

레위기 11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성경 통독이

그렇게 어렵고 지루하다는 레위기에 왔습니다.

통독 반원들께는 레위기에 집착하지 마시고 쭉쭉 읽어 가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그만큼 레위기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어제 레위기 11장을 만났습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을 구분합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하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해당하는 낙타, 토끼, 돼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완벽한 물고기의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독수리, 타조, 올빼미처럼 먹이를 탈취하는 조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동시에 네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도 부정합니다.

메뚜기처럼 날개가 있어도 네 발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1장 1-23절)

 

심지어,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접촉해도 부정합니다.

이처럼 정한 것과 부정한 것 (clean vs. unclean)에 대한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합니다.

 

2.

그런데 레위기 11장에서 알려주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로, 특별한 기준이 없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임의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요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을 고려한 해석입니다.

 

둘째는, 본문의 부정한 짐승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의 제사에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니 먹을 수 없습니다.

돼지가 대표적인데, 그렇다면 바알신의 상징인 소고기도 금해야 했기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셋째는, 의학이 발달한 근래에 제기된 의견으로 위생상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세균을 옮기기 쉽거나 박테리아 등을 갖고 있는 위험한 짐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상하기 쉽고 종종 전염병을 일으키는 돼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 건강상 해롭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네 번째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온전한 것(wholeness)과,

창조 섭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normality)을 중요시 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것으로 분류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먹이를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비약이 있고 주관적입니다.

 

3.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의견만 지지하거나 고집할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를 두고 집요하게 연구할 것도 아닙니다.

본문 자체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셨을 것이니

본문의 규정을 현대에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의적 명령이든,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했든지

위생상의 이유나 상징적인 의미에서든지 11장의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들은 없는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먹는 것으로 거룩함을 유지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갖고 거룩함을 지켜야 할까요?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 봅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therefore, and be holy, for I am holy. (Lev 11:44)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복잡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함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7이-메일 목회 서신)